배수아 신작 장편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 극전 반전 돋보이는 ‘생소한 텍스트’
입력 2011-12-16 17:36
소설가 배수아(46)의 신작 장편 ‘서울의 낮은 언덕들’(자음과모음)은 기묘하고도 생소한 텍스트이다. 올해 출간된 한국 소설 가운데 가장 난해하고도 극적인 소설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30대 여성이 화자(話者)이다.
경희는 낭송극 전문 무대배우로 오래 활동해왔으나 점차 성우, 아나운서 등에 밀려 일거리가 줄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낭송극 배우란 일제 시대를 전후해 유행했던 직업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현재가 아니라 적어도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희는 자신의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받고 “더 이상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막연하고도 암울했으며, 더 이상은 아무런 행복도 불행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므로 불가능하게도 그를 찾아서, 걸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11쪽)라며 먼 나라, 먼 도시로 여행을 떠난다. 단출한 여행가방을 들고 낯선 도시의 공항에 도착한 경희의 독백에 이 소설을 여는 열쇠가 있다. “왜 사람들은 공항이라는 장소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건너가는 환생의 정거장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숨기는 걸까요.”(13쪽)
경희는 독일 베를린으로 추정되는 도시의 중앙역에 도착하지만 마중 나오기로 했던 민박집 주인을 만나지 못한 대신 ‘우리’로 지칭되는 현지 사람들을 만나 임시로 체류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반치’ ‘치유사’ ‘동양인 남성’ 등으로 호칭되지만 어떤 존재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종종 화자는 명확한 기준 없이 ‘경희’에서 갑자기 ‘우리들’이라는 복합적 주체로 이동하기도 한다.
경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존재의 중첩’이라는 개념을 불쑥 끄집어내며 이렇게 말한다. “문지방에 낯모르는 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어요. (중략) 그들이 바로 나라는 느낌, 바로 내가 모르는 불분명한 내 사진,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라는 느낌,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나 자신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모종의 뒷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결코 알아보지 못하고 말 그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51쪽)
마치 낯선 꿈으로 이루어진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듯, 경희의 목소리는 이 지상에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혼란을 유발한다. 예컨대 미스터 노바디가 “나는 도시인이지만 동시에 오래된 민족적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고대인이기도 하다”고 말하자 경희가 “그럼 나는 당신에게서조차 떨어져 나온 외톨이란 말이군요”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자 ‘당신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는 식의 ‘존재의 중첩’ 의식이야말로 그 아름다운 혼란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경희’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대신 누군가 경희에게 부친 편지가 ‘수취인 불명’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채 베를린의 주소로 돌아오자 그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경희의 흔적과 기억을 더듬으며 서울로 건너온 ‘우리들’의 목소리가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그곳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가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곳은 서울의 일부였지만 도시라기보다는 버려진 공사장의 폐허와 같았고, 풀들이 자라난 흙더미 사이사이로 더러운 물웅덩이가 숨어 있었고 검은 모기떼들이 날아다녔다.”(273쪽)
‘우리들’은 서울의 낯선 구릉에서 피어난 보랏빛 루핀꽃을 보고 중얼거린다. “누구인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닌 썩어가는 이 도시의 폐허에 하필이면 루핀의 씨앗을 뿌린 자는.”(273쪽)
‘우리들’은 마침내 대학로로 추정되는 한 공연 무대에서 ‘경희’를 찾아내 편지를 건넨다. 이 대목에 이르면 소설은 마지막 2% 정도의 분량만을 남겨 놓고 있다. 문제는 마지막 2%에 들어 있는 반전 혹은 시간적 점프에 있다. 소설 끝에 등장하는 ‘나’는 경희가 낳은 딸이다. ‘나’(경희)-우리-나(경희의 딸)로 이어지는 소설 속 화자의 변주에 대한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들을 다시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리둥절이야말로 존재의 중첩에 대해 들려주는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다. “나는 부모의 원에 의해 태어난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루핀을 꺾어 노트 사이에 남겨놓은 것처럼,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무의지적 부모에 의해서 꺾이고 읽히고 마침내는 홀연히 남겨지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안심이 된다. 나는 스스로 낮은 언덕의 루핀이 된다.”(308쪽)
배수아는 “‘북쪽 거실’(2009) 이후 나의 문학은 분절된 목소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며 “스토리를 진행하되 오직 파열된 단면으로서 나타내기.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비서사적 진술 방식의 발견이며, 내가 저항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을 소설의 명품 필수 아이템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베를린을 여행 중인 배수아는 이달 말 귀국할 예정이다.
글·사진=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