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진홍] “애국심을 갖고 일해 달라”
입력 2011-12-15 17:35
투철한 애국심이 세계 일류기업 탄생과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경우는 드물다.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사회적 공헌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국가를 위해 창업했고 발전시켰다고 장담할 수 있는 기업인들은 흔치 않다. 이런 면에서 지난 13일 타계한 ‘철의 사나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그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포스코가 세계 일류기업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그의 인생관대로 숱한 난관을 뚫고 현재의 포스코를 있게 한 원천에는 뜨거운 조국애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일청구권 자금이 포스코 설립에 사용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피(血) 값이다. 공사를 성공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다 숨진 선조들에게 빚을 졌으므로 결코 실패해선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 부정부패가 스며들 여지를 원천봉쇄한 것은 물론이다.
가장 아끼는 물건은 ‘헬멧’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헬멧’이었다. 헬멧은 완벽주의의 상징이다. 1977년 콘크리트 구조물이 80%쯤 올라간 발전송풍설비가 부실하게 지어진 것을 발견하곤 “폭파해”라고 지시하고 폭파기념식까지 가진 일화는 대표적 사례다. 요즘은 흔한 일이 됐지만, 공장이 완공되기 이전인 1960년대 말 사원주택을 먼저 지어 직원들에게 분양하는 등 인본주의 경영도 화제가 됐었다.
‘철강인 박태준’이 1981년 ‘정치인 박태준’으로 변신한 것도 포스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포스코를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켜줄 울타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정치에 참여해 스스로 울타리가 돼야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의 정치경력은 화려하다. 민정당 대표,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하지만 울타리 역할의 대가도 컸다. 민자당 시절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대권 경쟁을 벌인 것이 큰 상처를 남겼다. YS는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박태준 최고위원 출마를 막기 위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다. 안전기획부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불출마를 종용받고, 그는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탈당한다. 하지만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그는 포스코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후 4년여 일본에서 낭인 생활을 하다 귀국해 자민련 총재를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 국무총리직을 맡았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128일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이렇듯 ‘정치인 박태준 20년’의 끝은 그다지 창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시대와 근대화 및 민주화 시대를 민족적 사명감으로 청렴하게 살아왔기에 그에 대한 존경은 좌우를 뛰어넘는다.
좌우를 넘어선 국가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은 전혀 없다. 1988년 포스코 직원 1만9000여명이 총 발행주의 10%를 배당받을 때에도 그는 단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스톡옵션을 받은 적도 없다. 포스코 명예회장직을 떠나 일본 망명길에 오를 때에는 퇴직금을 받지 않았고, 포스코 명예회장직에 복귀해서는 무보수로 일했다. 집마저 사회에 환원했다. 사익(私益) 추구는 국가와 국민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그의 철학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쇳물보다 뜨겁게 살다가 빈손으로 홀홀히 떠난 그의 빈소에는 재계는 물론 여야 정치인들,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애국심을 갖고 일해 달라”는 그의 유언이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철강 자급시대를 열고 우리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의 별세를 애도한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