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연예인? 참, 애매합니다∼ 낸시랭의 자기 선언 “나는 팝아티스트다”
입력 2011-12-15 18:03
마르셀 뒤샹이 1917년 ‘앙데팡당(independent) 전시회’에서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한 이후, 미술은 거장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새기는 영역을 뛰어넘었다. 이제 ‘현대미술가’의 칭호는 새롭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이에게 돌아간다.
뒤샹의 파격에서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의 갑남을녀가 아는 현대미술가는 국내에 누가 있을까? 우선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이 떠오르고…, 그 다음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낸시랭’이라는 이름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연예인 같기도 해서 선뜻 예술가에 포함시키기가 쉽지 않다.
낸시랭은 스스로를 ‘팝아티스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 1년 넘게 고정 출연했고, 현재도 3개의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에 연예인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게다가 그는 홈쇼핑에 출연해 속옷을 팔기도 했었다. 그는 진짜 예술가일까, 아니면 예술가를 빙자한 연예인일까. 애매한 그의 정체를 확인해보자.
나는 팝아티스트다
14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 가죽재킷에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작품이 그려진 귀고리를 한 낸시랭이 들어온다. 분신 같은 고양이 인형 ‘코코샤넬’도 함께 했다. 코코샤넬을 어깨에 올리는 동작은 오랜 습관적 행동처럼 군더더기 없이 매우 날렵하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당신은 예술가입니까? “네 맞아요. 팝아트를 하는 팝아티스트에요.” 즉각 대답이 돌아온다.
낸시랭은 ‘정통’ 화가다. 그는 홍익대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쳤고 2001년부터 매년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그가 개인전을 열지 못한 해는 어머니의 암 투병 탓에 작품 활동할 정신이 없었던 2008년과, 자신의 음반발매를 준비한 올해뿐이다. 지금은 내년 여름에 개최할 전시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사람 얼굴에 로봇 몸통을 가진 ‘터부 요기니’ 시리즈는 100편 가량 그렸다. 아무런 자격 없이 예술가 운운하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낸시랭이 한다는 팝아트, 즉 대중예술은 만화와 상업디자인, 영화, 사진 등 매스미디어의 모든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현대미술의 한 장르다. 대표적인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일상의 저속한 이미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낸시랭은 명품가방과 일본 로봇 애니매이션 건담 등 대중문화 영역의 소재들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팝아트, 행위예술의 답습”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워홀 이후 모든 팝아트는 똑같겠죠.” 그는 ‘나는 가수다’ 논리로 맞대응한다. “나가수에서 옛 노래를 재해석해서 부르면 그건 새 작품 아닌가요?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어요.” 이제 32살인 예술가에게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지적일지 모른다.
그런 비판을 불식시키고자 낸시랭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미술, 패션, 정치 등의 흐름을 읽고, 센서를 켜놓고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죠.” 방송은 그가 자신의 예술세계에 녹이고 싶은 영역이다.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는 아티스트와, 오로지 보여지는 것만을 신경 쓰는 연예인의 영역을 섞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장기 목표다.
“돈이 모이면 내년에 파리에 가서 못다 한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선 생기가 돌았다. 이것이 ‘생의 근원적 활력’ 같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예술가는 창작을 향한 끓어 넘치는 감정을 갖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비춰보자면 낸시랭은 예술가가 맞다.
악플 환영
인터넷 포털에서 낸시랭을 입력하면 연관검색어로 불륜, 국제망신, 노출 등 부정적인 단어가 많이 뜬다. ‘낸시랭 미쳤나요?’라는 질문도 있다. 건전한 비판에서부터 인신공격성 악플까지 그에 대한 비난은 인터넷에 넘쳐난다. 이런 것들 어떻게 생각해요?
“안티 팬에게 감사해요. 입가에 미소도 지어지고. 예의상 말하는 게 아니에요.” 뉴스도 많고, 관심가질 사람도 많은 시대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란다. “예술에서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이에요. 소통되길 원해요. 욕이든 칭찬이든 행위와 작품이 거론되는 것은 소통이잖아요.”
낸시랭의 퍼포먼스 중에선 악플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논쟁적인 것들이 꽤 많다. 그는 지난 10월 야구장에서 시구를 하면서, 포수에게 공을 던지지 않고 데굴데굴 굴렸다. “시구하기 전에 다른 분들이 했던 시구를 찾아봤어요. 야구선수처럼 아주 잘 던지든지, 옷을 섹시하게 입든지 했더라고요. 전 외모가 뛰어난 배우나 가수도 아니고 예술가니까. 남들이 한 번도 안한 방법으로 해보자, 앞으로 야구가 잘 굴러갔으면 좋겠다는 뜻도 담아서 굴렸죠. 하면서 ‘난 천재야!’ 싶었다니까요.”
하지만 신성한 마운드를 모욕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참신한 시구라는 평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다만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의 퍼포먼스는 야구장도 예술행위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야구팬들에게 마운드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 나오는 것도 현대미술의 매력이에요. 그게 좋아요.” 뒤샹이 변기를 전시했을 때도 칭찬보다는 비난이 더 거셌었다.
“뭔가 불편하니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유교적인 사상이나 체계화된 교육 내용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낸시랭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를 향한 악플 공세는 아티스트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술가는 이 세상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자극을 줘서 뭔가를 구현하게 하는 사람이 예술가입니다.” 현실을 뒤집어 보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 풍성하게 하는 것이 현대 예술의 역할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낸시랭은 충분히 예술가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신 자신이 되라(Just Be Yourself)!
낸시랭은 인터뷰 동안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 이는 인간 낸시랭의 좌우명이자 예술가 낸시랭을 지탱하는 큰 동력원이다. “사람은 모두 유일한 존재이고 가진 달란트가 다 다른데 요즘엔 획일화되고 있잖아요.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이뤄야 할 인생의 큰 목표여야죠. 이를 예술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게 제 삶이고요.”
일반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돈 얘기를 매우 꺼린다. 하지만 낸시랭은 돈을 좋아하는데다 그 사실을 스스로 떠벌리고 다닌다. “미술계 성격상, 예술가가 돈 얘기하고 TV에 출연하고 하면 작품이 쓰레기다, 정신이 썩었다고 해요. 그런 얘기 좀 들었죠.”
하지만 돈이 있어야 해외에 가서 하고 싶은 퍼포먼스를 할 수 있다. 고고한 척해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없고, 결국 오롯한 자신이 될 수 없다. 일부 예술가들이 ‘돈 때문에 타협했다. 그래서 내 작품은 오염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낸시랭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낸시랭이 좋아하는 책 목록 중에 경제적 요인인 하부구조가 정신적 요소인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들어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낸시랭은 자신의 작업과 퍼포먼스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에 “이색적인 놀라움과 재미, 즐거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여겨 외면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은 어렵지 않고 친근한 것이란 이미지도 심어줬다고 했다.
하지만 낸시랭의 작업과 퍼포먼스가 현재 시점에서 갖는 진짜 가치는, “당신 자신이 되라”는 메시지에 있는 듯하다. 낸시랭의 작품을 접하고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이가 늘어난다면 그의 작업은 우리 사회에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낸시랭은 최근 진행 중인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어시스턴트에게 전화를 걸어 요구사항을 주문한 뒤, 직접 차를 몰고-그는 매니저나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고 있는 연예인이 아니다-홍대 인근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가 될지, 그저 시류에 영합한 반짝 인기의 작가에 그치고 말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확실히 보였다.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