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철휘 (15) ‘폭약 버터’ 사건… 그건 시련 아닌 예비된 연단

입력 2011-12-15 17:37


나는 중대장실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헬기로 수도통합 병원까지 후송됐던 병사들이 위세척을 빨리 하는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왔다. 아까운 젊은이 둘을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을 뻔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보직해임은 없던 일로 용서가 됐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간 분망한 군 생활을 핑계로 잠시 소홀했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 일로 뼈저린 교훈을 몇 가지 얻었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약 덩어리를 버터로 생각하고 밥에 비벼 먹을 거란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발단이 된 편법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원형의 탄약에서 폭약을 잘라낸 것이 잘못이었고 시범 후에는 그것을 즉시 반납해야 했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보고에만 의존하지 말고 현장이나 현품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대대장님이 먹다 남은 버터 덩어리를 가져와 보라고 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선임하사의 보고만 믿고 현품을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내가 버터의 실체를 빨리 확인해 헬기 요청시간을 앞당겼더라면 병사들의 생명은 더 안전했을 것이다.

나는 군 생활 동안 이 교훈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결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느 방안이 원칙에 가까운가에 기준을 두었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반드시 결과보고를 받았다. 현장에 자주 가보고 지휘관들이 보고하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현장방문 시간은 항상 계획보다 오래 걸렸다. 어떤 때는 부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현장이 확인되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풍토가 조성되는 거라 믿었다.

드디어 1980년 2월 기다리던 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났다. 첫 부임지인 7사단에서 60여 개월을 보낸 후 처음으로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이 보장되는 보병학교에서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도 매주 빠짐없이 나갔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육을 받으며 여기저기 어떻게 하면 보병학교 교관으로 남을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첫째는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조건은 충족됐다. 둘째는 교육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매일 밤샘을 하며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과정의 3분의 2 가량을 지나면서는 상위 10% 안에 들게 됐다. 나는 교관으로 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마음 편히 교육수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기 군인력운영계획이 변경되면서 우리 기수에서는 교관을 한 사람만 뽑게 됐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전방으로 가는 신세가 됐다. 이처럼 나의 군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나의 희망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그것은 나를 위한 또 다른 축복의 시작이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