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의 Art Talk] 영혼이 느껴지는 풍경화
입력 2011-12-15 18:12
종교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영적체험을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거대한 설산과 눈 덮인 거봉, 깎아지른 듯한 절벽, 형형색색의 기암괴석, 망망대해와 같은 자연이 창조한 걸작품들과 교감할 때다. 대자연과 신성(神聖)을 연결짓는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은 ‘신의 산’, 세계적인 관광명소 나이아가라 폭포는 ‘천둥 치는 물’,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된 이구아수 폭포는 ‘구름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불린다.
자연풍광 속에 내재된 신성한 힘은 미술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가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종교의 경지로 승화시킨 풍경화를 창조했다. 영성(靈性)이 느껴지는 풍경화란 어떤 것일까? 그림을 감상하면서 체험해 보자.
화면에 검정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바위산에 올라가 짙은 안개에 싸인 산맥을 응시한다. 그가 왜 안개 자욱한 바위산에 홀로 서서 풍경을 바라보는지 감상자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자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으니까. 화가는 그런 감상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해답의 실마리를 그림 속에 남겼다. 웅대한 대자연, 농무(濃霧),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절제된 색채로.
이런 정보들을 조합하면 그림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남자는 장대한 자연풍광과 마주하면서 사색에 잠겨 있다고. 해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고. 인생에 대해, 예술에 대해, 고독에 대해, 인간존재의 유한함에 대해, 영원한 삶에 대해….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어록이 이를 증명한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나와야 하고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의존한다…눈을 감으면 마음의 눈으로 최초의 심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풍경화는 프리드리히표 화풍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숭고미와 뒷모습이다. 숭고미란 초자연적인 대상과 만났을 때 경험하는 벅찬 감동을 말한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창세기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광대한 사막이나 고산 지대의 만년설, 수천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계를 바라볼 때 인간은 압도당한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경외심과 숭배의 감정이 솟구친다.
경이로운 대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영원한 우주에 비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찰나적인가 깨닫게 되면서 겸허해진다. 순수해진 마음은 미적 쾌감을 낳게 되는데 이것이 곧 숭고미다.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숭고미를 예술의 최고 가치로 여겼다. 낭만주의 대표화가였던 프리드리히도 대자연과의 교감을 예술의 최종목표로 삼았다. 숭고미의 자양분은 조국 독일의 대자연이었다. 이는 ‘독일의 자연풍광은 하나님의 작품을 대표하는 가장 신성한 창작품’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다음은 뒷모습. 프리드리히는 ‘뒷모습의 화가’로 불리는데 등장인물을 대부분 뒷모습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왜 하필 뒷모습을 선택했을까? 이유가 있다. 뒷모습은 감상자에게 그림 속 인물과 동일한 감정을 갖게 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주장을 참고하면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진실은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에 있다…중요한 것은 내게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라는 사실이다. 같은 방향, 같은 대상, 같은 이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상대방과 마음이 통하는 기쁨을 맛본다.’
이제 프리드리히표 풍경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정리해 보자. 프리드리히 시절 대다수 풍경화가들은 자연의 외양을 캔버스에 복제했지만 그는 우주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영적인 풍경화를 창조했다. 그래서인지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초반보다 21세기에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마음에 낀 거품을 걷어내는, 비대해진 욕망을 다이어트하는, 수다보다 침묵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 풍경화는 감상자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준다. 인생이란 험준한 바위산에 올라가 안개 자욱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하지만 그 순간이 은총이라고.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사비나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