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벗삼아 돌고 도는 대구 골목길… 오정미 시집 ‘젊은 골목길’ 따라 역사·문화 순례
입력 2011-12-14 18:55
‘골목 위로 해가 뜨네/ 담장 위에 해가 지네// 담장 위에 달이 뜨네/ 골목으로 달이 지네// 골목에서 사람을 보네/ 골목에서 삶을 보네// …// 역사가 있어 생기는 길/ 문화가 있어 태어나는 길// 역사가 지나는 길/ 문화가 숨쉬는 길’(오정미 시인 ‘대구의 골목길’ 중)
대구는 골목길의 도시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남북 1㎞, 동서 1.5㎞의 중심가에 위치한 골목은 모두 1000여 개. 지금은 뒷골목으로 전락한 영남대로를 비롯해 약전골목, 진골목, 공구골목, 미싱골목, 먹자골목, 로데오거리, 야시골목, 늑대골목, 통신골목 등이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구 골목길에는 삶의 흔적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350년 역사의 약전골목에서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고,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생겨난 통신골목에서는 갤럭시와 아이폰의 전파가 하늘이 바쁠 정도로 날아다닌다. 어디 그뿐인가. 돈 없는 청춘들이 ‘배추 찌짐 한 넙대기에 막걸리 한 사발’로 학문을 논하고 시대를 한탄하던 학사골목 등 대구 골목길은 저마다의 독특한 표정을 연출한다.
천(千)의 얼굴을 자랑하는 대구 골목길이 최근 시(詩)의 옷을 입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대구 골목길을 순례하듯 쏘다녔다는 향토시인 오정미(40)씨가 최근 이를 소재로 ‘젊은 골목길’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덕분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최대 번화가였던 북성로 공구골목은 없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산업의 현장. 지금은 신기할 것도 없지만 당시엔 망치질 몇 번이면 M1소총도 만들었다고 한다. ‘대포도 나온다/ 탱크도 나온다/ 비행기도 나올까’로 시작하는 ‘북성로 공구골목’은 시인의 즐거운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이곳 골목길 여행의 출발점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고택. 단층 한옥이 길 건너 고층아파트와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상징한다. 이상화 고택 맞은편 한옥은 국채보상운동으로 유명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
약전골목 뒤편에는 황토색 포장을 한 작은 골목이 염매시장까지 이어진다. 이 골목은 조선시대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던 영남대로의 일부. 여염집 벽에 그려진 지게 진 농민과 갓 쓴 선비가 21세기 골목길 순례객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골목길은 사람을 끌어들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긴 골목’을 뜻하는 진골목은 부자들이 모여 살던 부촌. 대구 최초의 붉은 벽돌 이층집인 정소아과를 비롯해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주요 무대로 나오는 백록요정 등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순례객들을 맞는다.
진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2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온 80여년 역사의 미도다방. 허름한 다방문을 열자 노인들이 옛날 그대로의 다방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며 추억을 반추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주인 정인숙(60)씨가 분주하게 오가며 차를 따르고 대화를 거든다. 벽에는 단골손님들의 작품인 듯 시·서·화 10여 점이 걸려 있다.
미도다방의 단골은 대구지역 문인과 화가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름을 날렸던 이인성 화백도 이곳 미도다방에서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김원일 소설가를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사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미도다방을 인수해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는 ‘만인의 연인’ 정씨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단골손님의 부음을 단골손님들에게 전할 때. 지금까지 단골손님들의 상가에 1000번쯤은 갔었다는 정씨의 바람은 노인들이 좀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대구 골목은 중앙로를 건너면 더욱 젊고 화려해진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와 골목에 울려 퍼지고, 가게를 수놓은 색색의 꼬마전구는 동화나라를 연출한다. 옷가게와 구둣가게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야시골목은 ‘패션의 도시’ 대구를 상징하는 아이콘. 단돈 몇 만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 패션으로 단장한 대구 미녀들이 ‘유리공주’처럼 활보한다. 인근 늑대골목은 남성용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곳.
청춘남녀들이 즐겨 찾는 곳은 20·30골목. 호화로운 건물도 명품 쇼윈도도 없는 좁고 어둑한 골목이지만 밤마다 먹고 마시고 굽고 찌는 냄새와 소리로 요란하다. 시인은 삼겹살과 소주가 모여 이야기하는 20·30골목을 ‘난 40이 되어 20으로 걸어가 본다’고 회상한다.
이밖에 골라 먹는 재미가 듬뿍 묻어나는 교동 먹자골목, ‘헌 옷, 버린 옷, 주운 옷, 남은 옷, 떨어진 옷, 기운 옷’ 등을 파는 향촌동 구제옷 골목, 컴퓨터 인쇄 시대에 아직도 납활자 인쇄기가 덜커덕 덜커덕 소음과 함께 과거를 찍고 있는 남산동 인쇄골목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카멜레온처럼 변신과 진화를 거듭한다.
대구 골목길 투어의 대미는 방천시장 옆 예술인의 거리에서 완성된다. ‘서른 즈음에’로 유명한 대구 출신 요절 가수 김광석의 동상이 세워진 골목에서 동시대를 살아온 시인은 혼자 앉아 기타를 치는 김광석을 만난다.
그리고 기타 반주에 맞춰 허스키하면서도 우수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혼자 앉아 기타 친다/ 혼자 앉아 노래 부르네// …// 난 그를 다시 그리지 않는다/ 다시 만나지 않는다”
대구=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