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입력 2011-12-14 18:03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일화다. 어느 날 세 명의 제자가 원로를 찾아와 자기들이 행했던 바를 한껏 자랑했다. 한 제자는 신구약 성경을 외웠다고 뽐냈다. 그랬더니 원로는 “그대의 방은 시끄러웠겠구만”하고 대답했다. 다른 제자는 신구약 성경을 베껴 썼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돌아온 원로의 답은 “그대의 방이 지저분해졌겠구만”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제자는 오랫동안 금식하여 굴뚝에 잡초가 자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원로가 말했다. “손님 대접을 게을리했구만.”
무언가 뒷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이 일화는 긴 여운을 남기며 여기에서 끝나고 만다. 여백의 미(美)가 아름다움을 더하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처럼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며 빨려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세 명의 열심 있는 젊은이는 보이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리라. 성경을 읽고, 쓰며, 금식하고…. 이렇게 신앙생활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이룸으로써 스승에게서 인정받고 싶었을까? 행함으로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 눈에 보이는 그 무엇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이런 것이 세 명 젊은이만의 욕구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원로의 대답에는 이런 속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외우느라고 방이 시끄러웠고, 성경을 베껴 쓰느라 방이 너저분했고, 금식하느라 손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데에 그쳤을 뿐 그대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했다네!” 영혼의 심지가 있는 자들이라면 제자들은 이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행동이 정지된다면 그 순간에 스스로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나는 같은 종류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다. 내가 연구논문을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신학대학 교단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자일 것인가. 만약 내가 설교하는 목사가 아니라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리석은 질문까지도 해본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나 자신을 옷처럼 감싸고 있는 이런 모든 삶의 조건과 생물학적 조건이 마치 ‘배설물’(빌 3.8)처럼 다 제거되어 버린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세 명의 제자와 스승이 나눈 대화를 생각하노라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영혼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기도하며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참고 마9:27)라고 마음으로 되뇔 뿐 말을 잃게 된다.
■ 남성현 교수는 고대 기독교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전문가입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초대교회사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한영신학대학교 교수와 몬트리올 대학교 초청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