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각당복지재단 김옥라 이사장 “아흔 세살 학생입니다… 대학원 다녀요”
입력 2011-12-14 10:12
배움과 봉사에 끝없는 열정을 안고 사는 그는 ‘아흔 셋의 청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라 말하며 웃는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은 늘 남들보다 몇 발자국 앞서 걸었다.
강원도 간성 출신인 그는 1945년 일본 도시샤(同志社) 여자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 문교부(현 교육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46년부터 걸스카우트 활동, 70년부터는 여성 운동을 했다. 81년에는 5년 임기의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World Federation of Methodist Women) 회장에 한국인 최초로 당선돼 민간 외교관 역할도 해냈다. 한국 여성 중 국제기구의 세계회장으로 활약한 최초의 인물이다.
국내에서 ‘자원봉사’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86년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설립한 그는 지금까지 자원봉사 전문인력 2만여명을 배출했다. 그가 ‘자원봉사의 대모’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꼼꼼하게 읽어냈다. 91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설립, 우리사회에서 금기사항이던 죽음의 의미를 공론화함으로써 생명존중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이타주의적 삶의 자세를 알리고 있다. 지난해엔 다문화가정을 품기 위해 다문화멘토 자원봉사자 교육을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집무실 창문으로 그의 집 정원이 보였다. 그의 집과 각당복지재단 회관이 한 마당을 사용하고 있다. 50년 넘게 신문로에 살고 있는 그는 지난해 마당의 창고를 허물고 그 자리에 회관을 건축했다. 회관은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사무실, 회의실 등으로 건축됐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4남 라제건(동아알루미늄) 대표가 건축설계와 감독을 해주었다.
-나이보다 훨씬 젊고 건강해 보이는데 비결이 있나요.
“그런 척하고 사는 거지요. 아직까지 힘들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아침마다 며느리가 준비해주는 5가지 색깔의 채소 샐러드를 먹어요. 채소는 색깔마다 영양이 조금씩 달라요. 제 기억력이 비교적 좋은 것은 채소를 골고루 먹고, 글 쓰는 것을 즐기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책을 읽고 기록하는 것,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이고요.”
-각당복지재단이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았지요.
“각당(覺堂)은 남편 고 라익진 박사의 아호입니다. 86년 남편과 함께 세운 재단 산하엔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 무지개호스피스회,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지구촌문화연구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동안 저를 사용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자원봉사자들이 항상 자원봉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싶어요.”
-그동안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신 일들이 참 많으셨습니다.
“저에게 지난 세월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이끌린 시간들이었어요. 그동안 제가 무엇을 하겠다고 미리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침 우리 사회에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강원도 산골처녀였던 저를 세상으로 불러내 사회를 위해 봉사하게 한 섭리를 생각하면 놀랍지요.”
그는 오래전부터 사회봉사와 밀접한 길을 걸어왔다. 기독교사회관이 사회봉사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일제 말기에 감리교 신학생이었던 그는 철원기독교사회관에서 저소득층 미취학 아동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1년에 한 번 씻을까 말까하는 아이들을 1주일에 세 차례 목욕시키고 아이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기뻐했다. 또 한국걸스카우트 운동과 한국교회여성연합회, 감리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활동 등이 모두 봉사활동의 연장이었다.
-걸스카우트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1952년, 일본어로 제작된 걸스카우트 안내책자를 봤어요. 전국조직망을 갖추고 전국대회까지 치른 일본 걸스카우트 이야기가 소상히 쓰여 있었는데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1948년 미 군정청에 근무할 때 걸스카우트 훈련강사가 한국에 왔었지만 한국의 호응이 낮아 일본으로 가버렸거든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일본에 뒤지는 것 같았지요.”
그는 1952년부터 전국 걸스카우트 실무책임자인 간사장과 이사를 지냈다. 부산 송도 걸스카우트 위원회와 창덕걸스카우트 조직을 시작으로 47년 동안 한국 걸스카우트 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걸스카우트 운동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애국심에서였다.
-걸스카우트 운동 중 기억에 남은 일은.
“1957년 7월 1일 미국 걸스카우트 본부와 세계연합회 공동 초대로 세계 7개국을 순회 방문했어요. 뉴욕에 도착했을 때 본부 책임자가 한국이 걸스카우트 준회원국이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며 태극기를 만들어 줄 수 있냐고 했어요. 태극기 제작은 청소년들에게 수없이 가르친 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지요. 저의 바느질로 만든 태극기가 애국가에 맞춰 게양되던 순간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63년 5월 한국은 정회원국이 되었지요.”
-74년 감리교단이 분열되는 아픔 속에서도 감리교여선교회는 하나였습니다. 당시 감리교여선교회 전국연합회장이셨지요.
“당시 감리교단은 K감독을 지지하는 법통파와 M감독을 지지하는 갱신파로 분열됐어요. 지방교회 여선교회 총무들로부터 ‘우린 법통입니까? 갱신입니까?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란 전화 문의가 빗발쳤어요. 전국여선교회 대표들을 정릉 안식관에 모이게 했습니다. 저는 신출내기 회장이었지만 여성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그는 전국에서 참석한 70여명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그리고 논의 끝에 75년 2월, 일간신문에 ‘여선교회는 교단분열에도 불구하고 선교와 전도사업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며 두 감독은 교단분열의 책임을 통감하고 지체 없이 교회를 하나로 통합할 방법을 모색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열린 감리교여선교회전국대회에 600여명이 참석했어요. 많은 숫자였죠. 당시 어느 시골 교회 여전도사는 ‘1주일간 금식기도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왔다’고 했어요. 그는 해마다 전국대회에서 은혜를 받아 꼭 가고 싶은데 담임목사님이 이번엔 가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교단본부에서 지방감리사에게 전화를 걸거나 전보를 보내 개교회 여선교회 회장들을 전국 대회에 참석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감리교단은 그 후 다행스럽게 분열 3년 만에 재통합됐다.
-1981년 한국인으론 처음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장으로 선출되셨죠. 임기 중에 많은 업적을 이루신 걸로 아는데.
“저의 기쁨과 자랑은 25년간 끌어오던 유엔 NGO 가입을 임기 중에 성취한 일입니다. 그리고 64개 회원국 중 40여 나라 100여 도시를 방문하며 회원들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 체험도 소중했습니다. 또 창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역사책을 발간하고, 제가 작사한 가사에 독일의 휸 부인이 곡을 붙인 세계감리교여성노래가 지구촌 여성들에게 불려진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죠.”
그는 평생 헌신해 온 자원봉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조직체를 만들고 싶었다.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세계회장 임기를 마친 직후였다.
당시 보건사회부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기 위해 3억원의 기본재산이 있어야 했다. 남편 라익진 장로가 출연해주어 86년 12월 13일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설립했다. 당시 그는 68세였다. 남들은 보통 은퇴하는 나이지만 새로운 삶에 도전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자원봉사의 마인드를 가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남녀노소가 서로 보살펴주고 서로 도와주는 사회가 될 수 있다면 나라는 건강해지겠지요.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하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 자원봉사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나요.
“우리나라에 고등교육 받은 여성들이 많아요. 이들은 분명 사회에 기여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원봉사로 사회에 봉사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또 이들을 민주주의 그늘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가난의 대물림으로 힘겹게 살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연결시켜주고 싶었습니다.”
-25년 전이면 자원봉사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법인을 만들려고 문화공보부에 갔는데 담당 국장, 과장이 서로 ‘자원봉사가 뭐지?’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자원봉사는 새로운 용어였죠. 은퇴한 수십명의 대학교수들에게 정중하게 자원봉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딱 한분이 낙향해 농사를 짓고 있어 어렵다는 회신을 보낸 것 말고는 한 통의 회답도 받지 못했지요.”
-진정한 자원봉사의 정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자원봉사자의 또 다른 이름은 ‘옥천(玉泉)’과 ‘반딧불’입니다. 자원봉사자는 바위틈에서 조금씩 솟아나는 깨끗한 샘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들어 거대한 탁류를 조금씩 맑게 변화시키는 ‘옥천’, 여럿이 모이면 더 큰 빛을 내는 ‘반딧불’이란 뜻이지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잠재의식에 남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누굴 돕는 일을 하자고 하면 잠재의식이 발휘돼요.”
그가 생각하는 자원봉사의 취지는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더불어 하는 것이었다. 모이는 교회가 예배드리는 것이라면 흩어지는 교회는 봉사하는 성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를 향해 흩어져서 봉사하는 교회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통해 고아 노인 장애인들을 위한 일반적인 자원봉사 활동을 펼쳤던 그의 마음에 미진함이 있었다. ‘남들이 다하는 봉사인데…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의 손길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무언가 우리 삶 저변에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87년 그는 ‘세계보건’이란 잡지를 보다 시실리 손더슨이란 여의사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됐다. 자신이 의사가 된 이유는 호스피스 봉사를 하기 위해서이고, 그 일은 자원봉사자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이 김 이사장의 영혼을 일으켜 세웠다. 이듬해 9월부터 왕매련 연세대 간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제1기 호스피스 자원봉사 교육을 시작했다. 그동안 6000여명이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다.
“자원봉사자들 가운데 진주가 있고 진주가 돼가는 이도 있어요. 진주조개를 기르는 어부가 오랫동안 진주알이 생기길 기다리듯 저도 진주 같은 자원봉사자들을 기다립니다. 교사 출신의 한 자원봉사자가 기억에 남아요. 봉사자가 안양여자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자수를 가르치며 ‘인생은 바늘로 수를 놓는 것 같아 한 바늘만 잘못 놓아도 전체를 망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진주를 얻은 어부처럼 기뻤어요.”
자원봉사자 교육 체계가 잡혀가던 중 그는 ‘작은 죽음’의 ‘깊은 강’을 건너야 했다. 90년 8월 사랑하는 남편이 지병으로 소천한 후 수많은 날을 사별의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남편은 퇴근 후 늘 아내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다. 그런 남편이 떠난 것이 너무나 서럽고 가슴 아파 울고 또 울었다. 그의 남편 라익진 장로는 한국무역협회 창업에 공헌했고 동아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4·19혁명 이후 체신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로 일했다.
-죽음을 터부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창립했나요.
“사별로 슬픔이란 늪 속에 깊이 빠져들고 있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어요. ‘죽음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론에 부치라.’ 윤보선 대통령을 앞서 보내시고 외로워하시던 공덕귀 여사와 수개월 전 홀로 되신 박대선 박사에게 죽음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청하자 두 분 모두 찬성하셨어요. 힘을 얻어 평소 알고 지내던 분들께 연락해 91년 4월 2일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출범시켰습니다. 모임은 죽음 준비교육을 하고 슬픔을 치유하자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또 죽음준비교육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사장님의 사생관은 무엇인가요.
“죽음준비교육은 삶의 교육과 똑같습니다. 삶의 연장이 죽음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지 아름답게 죽을 수 있고, 죽을 때 적어도 후회할 일이 없게 살아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치매에 걸리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으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또 임종은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가족과 자원봉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러분 사랑해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맞을 수 있길 바랍니다.”
-남편의 외조가 각별하셨는데 사별 후 재단운영의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남편이 돌아가신 후 사무실을 운영할 재정이 없어 저희 집을 사무실로 사용했어요. 처음엔 4명의 아들들이 후원해 주었고 지금은 막내아들이 1년에 5000만∼6000만원씩 후원해줍니다. 저희가 별도로 모금운동을 하지 않지만 10만원, 20만원, 100만원씩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구촌문화연구회는 어떻게 시작한 것인가요.
“지난해 9월 27일 회관을 봉헌하면서 지구촌문화연구 특강을 했는데 관심들이 많았어요. 당시 이민족을 돕는 것이 사회적 이슈였어요. 다민족에 대해 알려면 우리부터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한국경제, 우리나라 현대사, 한국사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문화 가정을 위한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민족공동체의 성숙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현재 그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 학교를 다닌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서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코칭아카데미에서 ‘코칭’을 배운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는 듯합니다.
“제가 90이 넘었는데 지금 학생이에요. 매주 목요일 8시간씩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데 너무 즐겁습니다. 코칭을 통해 인간관계를 배우고 내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해야 하는가를 터득할 수 있어요. 자원봉사는 코칭과 사촌 사이 같아요. 자원봉사 마인드에 코칭의 옷을 입히고 싶어요.”
매일 아침 마당을 가로질러 회관으로 출근하는 그의 출근 인사는 “사랑합니다”이다. 직원들도 그를 “사랑합니다”로 맞이한다. 대화하면서 살짝 살짝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타인에 대한 배려인 듯했다. 세계 각국의 친구들에게 이메일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써서 보내는 그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최종학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