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김황식 총리의 리더십
입력 2011-12-14 17:36
“조용한 리더십이 신뢰감 을 주며 국민 통합에 도움 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국무총리실을 비교적 오래 출입했다. 세 번이나 출입하다 보니 무려 5명의 총리를 가까이서 접해 볼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 때의 강영훈 노재봉 정원식, 김영삼 정부 때의 이수성 고건. 인물평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닐 뿐더러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느낀 점을 말해 보라면 대략 이렇다. 강 총리는 외유내강형 학자풍이고, 노 총리는 좀 차다는 인상을 남겼다. 정 총리는 무색무취한 교수 스타일이고, 이 총리는 다정다감한 분으로 기억된다. 고 총리는 큰 몸집만큼이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기억력이 대단하다는 건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총리의 이상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포용력을 갖춘 원로형이 좋다는 주장과 대통령을 행정적으로 보좌하는 실무형이 낫다는 생각이 팽팽히 맞서 있다. 군사정권 때는 전자를 선호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후자 쪽으로 다소 무게가 기울었지만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이는 총리 자체가 이론적 기반이 없는, 참으로 애매한 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의 대통령제와 한민당의 내각책임제를 혼합한 타협안을 채택하다 보니 기형이 나온 것이다.
현행 헌법 제86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사권과 예산권도 없이 어떻게 행정각부를 통할하라는 건지 의문스럽지만 이런 총리의 위상은 제헌 이후 63년째 유지되고 있다. 총리제도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는 국민적 동의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요즘 김황식 총리가 주목받고 있다. 전남 장성 출생, 63세, 광주일고·서울법대 졸업, 대법관·감사원장 역임. 작년 9월, 그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총리 지명을 받았을 때 국민들의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김태호 총리 지명자가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자 위기에 몰린 이 대통령이 총리 최적임자를 찾기보다 청문회 통과가 확실한 사람을 선택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1년 수개월이 지난 지금 김 총리는 바람직한 총리상을 착실히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는 ‘이슬비 총리’를 자임하며 낮으면서도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존재감 없는 게 내가 목표하는 바다. 컬러가 없는 게 내 컬러다”라는 그의 말이 어딘가 신뢰감을 준다. 정치인 출신이나 정치성향이 강한 전직 총리들의 미사여구 발언에 식상해서일까.
김 총리에게서는 매사 진정성이 보인다. 연평도 피격 1주년 추도식에서 우산도 없이 장대비를 맞으면서 조문한 점, 경기도 평택 소방관 빈소에 경호 및 의전팀 없이 조용하게 조문한 사실은 국민들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저께도 중국어선 선장에 피격당해 목숨을 잃은 해양경찰관 빈소를 찾아 “나라가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심이 많은 점도 대국민 소통이 절대 부족한 현 정부에 경종을 울릴 만하다. 총리실 트위터 팔로어는 2만명에 육박하고, 페이스북 ‘좋아요’(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읽는 사람)는 9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김 총리가 틈틈이 올리는 육필 메모가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진보 성향의 일부 몰지각한 네티즌들은 보수언론이 의도적으로 ‘김황식 띄우기’를 한다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총리의 최근 행보는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회통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미더운 총리를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다.
다만 김 총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국정과제에 대해 얼마만큼 조정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는 과문한 탓에 왈가왈부 논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대통령을 상대로 적기에, 제대로 직언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점은 임기 말 총리로서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