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철휘 (14)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입력 2011-12-14 17:52
나는 고민 끝에 전방 위주로 전투경험을 쌓는 야전형 군인이 되기보다는 다시 교관을 하거나 위탁교육을 받아 학문을 하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이라는 석사과정이 있었다. 군이 전산화를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전망이 밝은 코스였다.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마음먹고 육군본부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야전군의 소대장들이 너무 많이 지원해 공석이 많이 생기자 모두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서울로 가는 꿈이 더 이상 나의 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의 소망을 방해하셨을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논 베르크 수녀원의 한 기둥에 씌어 있다는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두신다”는 사실을 그때 체험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서 친척집에 놀러왔던 아내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 후로 함께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갔고 지금의 가정을 이뤘다. 결혼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경계초소(GOP)에서 중대장을 시작했다. GOP 중대장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24시간 내내 부대에 있어야 한다. 민간인은 구경도 못하고 한 달에 고작 2박3일 동안 외박을 나갈 뿐이다. 그래서 딸아이는 낯선 나를 보기만 하면 울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 자체가 안 됐다. 계속해서 산 속에만 있다 보니 다시 후방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제까지 육군에 전례가 없던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중대가 사단장님을 모시고 야간 각개전투 시범을 보이는 임무를 받았다. 예행연습 과정에서 ‘크레모아’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자칫하다간 대항군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중대 간부들이 모여 토의한 결과 폭약의 양을 적게 하기로 하고 폭약을 조금씩 잘라내어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런데 잘라낸 폭약을 처음 본 병사 두 명이 버터로 착각해 야외훈련 중 밥에 비벼 먹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처음 두 명의 병사가 똑같은 증상으로 내 앞에서 쓰러지자 나는 식중독일 것이라 생각했다. “둘이 같이 밥을 먹었는가?” 물었더니 선임하사가 “둘이 밥에 버터를 비벼 같이 먹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식중독이라 확신한 나는 대대 상황실에 앰뷸런스를 요청한 후 대대장님에게도 지휘보고를 했다.
대대 군의관이 훈련장에 와서 환자들을 태우고 떠나자마자 이번엔 대대장님 지프차가 나타났다. “한겨울에 식중독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먹다 남은 버터를 가져와 봐라.” 그런데 선임하사가 들고 온 것은 버터가 아니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져 있는 것은 지난 시범 때 잘라내어 감춰뒀던 폭약이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대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보니 병사들이 먹은 건 버터가 아니라 폭약 덩어리입니다.” 내 얘기를 듣는 대대장님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대대장님은 신속히 무전으로 헬기지원을 요청하셨다. 나는 그 길로 연대장님에게 불려갔다. “자네는 육군 역사에 없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새 길을 찾기 바라네.” 그러더니 중대장 보직해임 명령서에 내가 보라는 듯이 아주 천천히 서명을 하셨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