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 타계] 국무총리 역임… DJT연합 주도 DJ 대통령 만들어
입력 2011-12-13 22:14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평생 기업인으로 살았지만 꾸준히 정치 외도를 했다. 네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유력한 대권후보였으며, 국무총리도 지냈다. 그러나 신화로까지 평가받는 기업인으로서의 삶과 달리 정치인생은 부침이 심했고 영욕이 교차했다.
고인은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처음 정계에 진출했다. 80년대의 정치 참여는 그야말로 부업이었다. 포철 경영자로서의 업무가 늘 최우선이었다. 당시 그는 “정치는 나에게 있어 외도다.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여겨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90년부터였다. 그해 벽두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요청으로 민정당 상임고문 자리를 맡았고 이후 3당 합당과 대선 등 정치적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92년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나서라는 권유를 받고 경선에 나서려다 당시 김영삼(YS) 후보의 견제로 뜻을 접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 YS와의 갈등 등으로 그해 10월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YS는 광양으로 달려와 그에게 선대위원장직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박 명예회장의 정치인생은 위기를 맞았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93년 3월 일본으로 출국해 4년 넘게 해외에서 유랑했다. 고인과 YS와의 악연은 문민정부가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박 명예회장은 97년 5월 귀국해 7월 포항 재보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당선 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총재를 맡은 그는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에 참여해 그해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DJ정부 두 번째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5월에 부동산을 명의신탁해 세금을 회피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그가 다시 정치 무대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김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