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테마주의 함정] 실적 상관없이 묻지마 급등… 결국 ‘폭탄 돌리기’
입력 2011-12-13 18:31
지난 7일 한나라당 선출직 지도부 5명 가운데 유승민·원희룡·남경필 최고위원이 사퇴하던 순간 코스닥시장에서는 아가방컴퍼니와 보령메디앙스, EG의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들 3개 종목은 전날에는 0.28∼2.36% 정도로 평범한 상승폭을 보였지만 이날 모두 10% 이상 올랐다. 주식시장에서는 이들 3개 종목을 ‘박근혜 테마주’라고 부른다.
이틀 뒤인 9일 3개 종목은 일제히 가격제한폭까지 상승폭을 키웠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직을 사퇴한 직후였다. 이후 13일까지 연일 상한가다. 투자자들은 닥치는 대로 주식을 사 모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전면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이들 종목은 뛰어올랐다. 유아용 의복 제작업체인 아가방컴퍼니와 보령메디앙스는 박 전 대표가 평소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자주 언급하면서 관심을 모아왔다. 산화철 제조업체 EG는 박 전 대표의 동생 박지만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다.
‘박근혜 테마주’와 함께 급등세를 보이는 주식은 ‘안철수 테마주’인 안철수연구소다.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안철수연구소 주가는 6월 말 1만9050원에서 13일 14만2100원까지 무려 646%나 뛰어올랐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의 대권 행보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안철수연구소의 주가는 오름세를 탔다. 하반기 들어 상한가를 기록한 거래일 수는 14일, 5% 이상 급등한 날을 포함하면 39일에 이른다. 같은 기간 안철수연구소는 시가총액 100위권에서 4위까지 뛰어올랐다.
정치인 테마주의 무서운 급등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가방컴퍼니는 주가가 연일 급등하는 이유를 묻는 한국거래소의 공시 요청에 대해 13일 “별도로 공시할 중요한 정보가 없다”고 답했다. 같은 요청을 받은 안철수연구소는 지난 9일 “기업의 실적·가치 이외의 기준으로 투자하는 것은 주주들의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안내하기까지 했다.
정치인 테마주는 올해 크고 작은 선거와 함께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거래소 시장감시본부 관계자는 “주식시장 전체적으로 60여개 종목을 정치인 테마주로 파악하고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분당 재보궐 선거 당시에는 손학규 테마주가 인기를 끌었다.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전후해서는 박원순 테마주, 나경원 테마주가 두 후보의 지지율에 따라 급등과 급락을 반복했다.
상장기업 분석, 적정 주식가격 분석을 주된 업무로 하는 각 증권사 리서치센터 연구원들은 정치인 테마주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기업의 가치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 유명인사에 대한 맹목적 기대감만으로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원은 “정치인 테마주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분석이 불가능하고, 소신 있는 평가라도 내리면 투자자들의 항의에 시달리게 된다”고 했다.
정치인 테마주의 가장 큰 맹점은 해당 정치인과 사실상 연관성이 없다는 데 있다. 인맥을 강조한 테마주의 경우 미확인 풍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장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소문에 휩쓸린 여성의류업체 ‘대현’이 대표적이다. 투자자들이 조금만 정신을 팔았다가는 손실을 입기 쉬운 ‘폭탄 돌리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당국은 지난 6월부터 정치인 테마주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거래소와 함께 ‘루머 단속반’을 구성해 유언비어를 단속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단속 강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치인 테마주는 계속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개인 투자자들은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묻지마 매매’를 이어가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정치인 테마주는 엄밀히 말해 ‘잡주’”라며 “다른 투자자를 현혹하는 이들도 문제고, 현혹당하는 투자자들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