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향 흐르던 시간 서로의 상처 보듬어… 장편 소설 ‘박하’ 낸 허수경
입력 2011-12-13 17:41
올 1월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내면서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던 재독 시인 허수경(47)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에 장편 소설 ‘박하’(문학동네)를 들고 다시금 한국을 찾았다. ‘박하’는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근 4개월에 걸쳐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되면서 화제가 된 소설이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선배가 있는 독일로 떠난 남자 이연의 이야기와 1세기 전 독일로 입양된 고고학자 이무(독일명 칸 홀슈타인)가 남긴 ‘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이라는 노트 속 이야기가 교차하는 소설은 허수경 자신이 20년째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마니아들을 들뜨게 했던 작품이다.
13일 서울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허수경은 “우리가 소속된 것은 국가나 나라가 아니라 언어공동체인데 다시 고국에 돌아오니 이 언어공동체가 얼마나 뜨거운가를 실감하고 있다”며 모국어에 대한 뜨거움으로 운을 뗐다.
“6년 전이었어요. 당시 고고학 발굴을 위해 옛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인 터키 하투샤라는 고대 도시에 반 년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바위 계곡에 피어 있던 야생 박하를 보았을 때부터 소설을 구상했지요. 한마디로 상처에 대한 이야기예요. 내 상처가 다른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인류의 역사는 ‘나’와 대상 사이의 연민의 역사가 아니겠어요.”
소설 속 이무의 기록에는 ‘하남’이라는 고대 도시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이무는 그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 하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직 꽃을 달지는 않았지만 잎을 하나 따 짓이겨서 코로 가져갔더니 5월의 어린 박하 향기가 선뜻, 내 심장으로 들어왔다. 박하향이 흐르는 그 시간, 고대이든 근대이든 현대이든 그 시간만이 우리의 시간이었다.”(192쪽)
박사 과정을 끝내고 학위논문을 인쇄 중에 있다는 그는 “논문을 마쳤을 때 고고학과 문학을 병행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문학으로 완전히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읽고 쓰는 일이 내 본문임을 깨달았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시와 소설을 병행하고 있는 데 대해 그는 “독일에서 오래 살다 보니 우리말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야기를 지으면서 우리말 연습을 하게 됐다”며 “시로 쓰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소설은 저인망이어서 조그만 물고기, 미세한 단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내 언어 실험의 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박하’를 최종 마무리하기 위해 지난달 11일 입국, 서울 연희창작촌에 머물렀던 그는 “영구 귀국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유럽에서 한국 국적으로 살 때 적지 않은 불편이 있고 그럴 때마다 독일이 타국 같기도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한국도 타국이 아닌가”라며 “아마도 글을 쓰기 위해 머무는 공간만이 내 조국이 아니겠느냐”고 에둘러 답했다.
마흔 후반이라는 나이를 의식한 듯 그는 “차기작이 시집이 될지 소설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제는 문학으로 시작한 것들을 완성해 놓는 일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허수경은 15일 출국할 예정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