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교회 산업선교 민주화 운동 토대 됐다”… 김명배 숭실대 교수 심포지엄서 주장

입력 2011-12-12 17:56

1970년대 기독교 진영의 노동운동은 노동자 스스로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데 맞춰졌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한국교회의 ‘산업선교’를 낭만적이고 비과학적인 노동운동의 전형으로 폄훼하는 일반 운동권의 부정적 평가를 뒤집는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숭실대 김명배(역사신학) 교수는 12일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에서 열린 현대한국 구술사연구사업단 학술 심포지엄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기독교 노동운동을 통해 산업선교의 함의를 살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서 가장 먼저 산업선교 활동을 시작한 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랜 기간 선교활동을 펼쳐온 조직이다. 김 교수는 특히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이끈 인명진 목사의 구술을 자신의 논지의 구체적인 근거로 삼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한국 산업선교는 교회 전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노동자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할 것인가”가 목표였다는 것. 영등포산업선교회 역시 1958년 창립 당시 노동자들의 개인 구원을 목적으로 조직돼 정기적인 예배와 전도모임을 갖는 수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노동현장의 문제가 양적으로 증가했다. 부당한 노동현실은 산업선교 목사들의 눈을 뜨게 했다. 인 목사는 “우리가 성경만 가르치고 그 이후의 문제들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할 수 없지 않냐”면서 “우리 노동 선교를 하는 목사들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당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산업선교는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노동조합이 대안적 교회로 부상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경인지역 산업선교회들은 1970년대 초 100여개의 기업에 노동조합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노동조합은 스스로 한계를 드러냈다. 어용노조의 무능과 부패가 문제였다. 인 목사는 구술문에서 노동조합을 또 하나의 노동자 탄압·착취 기구로 규정짓고 “노동자의 권리향상은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74년부터 소그룹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화 교육을 시작했다. 소그룹은 1979년 100개로 불어났다. 취미활동, 교양 등 가벼운 주제를 주로 다루었던 소그룹은 결성 3∼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의 노동문제나 정치, 경제 등에 대해 토론했다고 인 목사는 회고했다.

김 교수는 인 목사의 구술을 근거로 산업선교가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산업선교는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근로조건 개선 투쟁을 고취했던 것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사상을 불어넣었다”며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또 “1970년대 기독교 진영의 노동 운동을 ‘경제적 조합주의’라고 낮게 평가하거나 그 실패의 원인을 교회에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