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공동체 희망을 쏜다] ⑤포스코, 장애인 일자리 위해 설립한 ‘포스위드’

입력 2011-12-12 20:27


(2부) 사회적 기업을 키우자

“두다리 없어도… 한손 굳었어도… 사는 맛 납니다”


지난달 28일 경북 포항시 남구에 위치한 ‘포스위드(poswith)’ 본사 1층 클리닝센터에는 세탁기와 건조기, 프레스기 등이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경주 대명콘도의 베갯잇과 침대시트, 포스코 직원들의 작업복을 세탁해 말리고 다림질하고 개서 차곡차곡 챙기는 장애인 직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애인 직원은 47명. 전체 직원 84명의 절반이 넘는다(56%). 하루 세탁량은 의류 5000벌, 수건 3만5000장, 장갑 700켤레다.

포스위드는 포스코가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2007년 12월 설립한 회사다. 포스코와 계열사를 상대로 근태 및 4대 보험, 연말정산 관리 등의 인사·노무·후생·총무 업무 대행, 근로자 작업복·수건·장갑 등 세탁, IT 시스템 문의 응대 및 콜센터 업무 수행 등을 주로 한다. 사업장은 포항과 전남 광양, 서울 등 3곳이다.

“장애인인 줄 모르겠죠?” 포항 클리닝센터에서 일하는 지체2급 장애인 김미애(43·여)씨 얼굴에선 구김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000년 급작스러운 다리 혈관 장애로 두 다리를 무릎 아래로 모두 잘라내야 했다. “수술 후 2년간은 집 밖에 나가질 않았어요. 죽고 싶었죠.” 어느 날 셋째 막내아들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두 다리가 없는 제 모습이 창피해 왜 친구들을 데려왔냐고 막내를 막 혼냈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은 ‘난 엄마가 창피하지 않다’고 말했어요.”

김씨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며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였던 김씨는 장애인 신문의 구인란을 뒤지기 시작했고, 3년 전 포스위드에 당당히 입사했다. 처음엔 콜센터에 배치됐다. 그러나 겁이 많은 김씨가 전화응대에 어려움을 겪자 회사는 김씨를 배려해 클리닉센터로 바로 옮겨줬다. 김씨는 “병치레로 돈을 많이 써 첫째는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다”며 “그러나 여기서 받는 월급으로 둘째와 셋째는 대학에 보냈고 빚도 많이 갚았다”고 말했다. 포스위드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의 초임 연봉은 1500만∼2000만원 정도다.

클리닝센터에서 배송업무를 맡고 있는 김태영(42·지체4급)씨는 “직장 출근길은 신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21년 전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손이 말려 들어가 오른쪽 손가락 2개를 잃었다. 다니던 공장은 그만둬야 했고, 이렇다 할 직장도 잡지 못했다. 11년 전엔 숯불갈비집에 취직해 양손에 숯불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져 상반신과 허벅지에 큰 화상까지 입었다. “손가락 절단 후 제대로 된 직장을 찾을 수 없었고 낮에는 식당 아르바이트,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포스위드를 알게 됐고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린 끝에 2008년 10월 입사에 성공했다. 김씨는 정부가 무상 지원한 18인승 장애인용 차량의 운전기사를 자원해 동료들의 출퇴근도 돕고 있다.

본사 사무지원팀의 장정일(34·뇌병변2급)씨는 왼손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오른손을 무의식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경영학을 공부하던 대학 학부시절인 2002년 폐결핵균이 갑자기 머리까지 올라와 뇌병변을 일으켰습니다.” 장씨의 오른쪽 몸은 전부 마비됐다. 치료에 전념한 기간만 5년. 오른손은 회복되지 않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고픈 바람은 좌절됐다. 장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무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친구 소개로 포스위드를 알게 됐고 울산 장애인공단을 통해 지난 7월 입사했다. 장씨는 “비로소 사회 구성원이 됐다고 느낀다”며 “포스코 등의 근태업무를 맡고 있는데 3∼4년 내 노무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새로운 계획도 세웠다. 지금은 결혼할 짝을 찾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포스위드 김형욱 총무팀장은 “각자의 처지에 알맞은 일을 하는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동일한 업무 효율을 낸다”며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항=김정현 기자 k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