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목사의 행복 칼럼] 행복in-행복人-행복印 (37)
입력 2011-12-12 15:17
내 외모부터 용서(?)하기
헬스센터,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데 프런트의 스탭이 말한다. ‘키는요?’ 놀란 이 남자, ‘157인데요.(으쒸)’ 아침 시간에 키가 몇 센치미터인지 물을 일이 뭐가 있을까? 손목에 차인 옷장키 달라는 거였는데…. 항상 자신의 키에 대한 열등감이 있던 이 친구. 자신도 모르게 키를 묻는 줄 알고 ‘157’이라 해 놓고 쓰라린 속을 ‘으쒸’로 곱씹어야 한다.
얼굴이 예쁘장했던 한 자매. 얼굴에 까만 점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까만 점만 없어도 자기가 더 예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까만 점을 없애기 위해 초산을 발랐다. 놀랍게도 이내 까만 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얼마 뒤 자매의 얼굴에는 동전 크기만한 동공이 뻥 뚫렸다. 이번에는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할 지경이 되었다. 까만 점 대신에 더 큰 흉터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
현대는 정신의 하위개념에 불과하던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가 되었다. “과거는 용서해도 뚱뚱한 것은 용서하지 못 하겠다”고 까지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예뻐지기 위해서라면 얼굴에 칼을 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육체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육체와의 전쟁을 벌이는 이 새로운 인간형을 ‘연기하는 자아’라고 한다. 연기하는 자아는 시각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탄생했다. 영화와 대중 인쇄매체,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과 광고의 ‘융단 폭격’은 언어의 시대를 이미지의 시대로 뒤바꿔 놓았다. 이 소비문화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정식이 태어났으니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건강과 동일시된 셈이다. 자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고, 젊음을 지속시키는 노력이 사회적 성취이기도 했다.
수술을 해서라도 예쁜 얼굴을 갖고자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더구나 신세대들이라 일컬어지는 청소년들은 아예 성형수술을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기기까지 한다. 성형수술만 하면 비너스처럼 변신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성인들에게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얼굴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인이 있었다. 많은 고민 끝에 성형 수술을 받기로 작정했다.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며칠을 아무 말이 없던 남편이 마침내 한마디 했다.
“여보. 당신이 성형 수술로 예쁜 얼굴을 갖게 되면 미인 부인을 둔 나도 참 좋겠지요. 하지만 걱정이 한 가지 있소. 다른 게 아니라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몰라보고 ‘나는 이렇게 안 만들었는데, 얘가 누구지? 누가 내 작품에 손댔어?’ 그러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호머와 밀턴은 눈 먼 시인이었다. 베토벤은 귀가 멀어 천둥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그는 그의 영혼으로 음악을 만들었고, 그 음악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칭송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곱사등이였고 로마 교황 알렉산더도 그러했는데 그는 더욱이 매우 고통을 겪고 있는 병약자였다.
사도 바울은 야릇한 모습의 난쟁이였는데 이로 인해 야비한 적들로부터 ‘3큐빗(약150cm정도)의 키’라고 조롱을 당했으나 성 크리소스톰은 그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들을 만진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호라티오 넬슨과 나폴레옹도 신장에 있어서는 그와 같았다. 셰익스피어도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절름발이였으며 스콧, 바이런, 캘빈도 모두 신체적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때는 언제일까?
송길원목사/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