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돌아온 ‘아마데우스’ 고난에 빠진 천재 열등감의 악인관객은 누구 편일까
입력 2011-12-11 17:50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내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것을요. 안됩니다. 난 영원히 그분의 장난감이 되기 위해 살았던 건 아닙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악인이 가난한 천재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을 보면서도 관객은 악인을 동정한다. 걷잡을 수 없이 시기 질투 탐욕에 휘말리는 살리에리가 보통의 우리들 모습이라면, 그 재능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순수한 모차르트는 천상의 존재일까. 명동예술극장의 기획 연극 ‘아마데우스’는 피터 쉐퍼의 원작을 충실히 해석, 예술에 있어서의 천재성과 신의 도구인 인간이라는 별개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줄거리는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나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불운한 천재를 동정하느냐 자신의 재능을 저주하는 범재를 연민하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의 선택. 가난과 질병 속에서 죽어가는 모차르트와 그의 마지막 대작 ‘레퀴엠’ 악보를 번갈아 바라보며 살리에리가 탄식한다. “이것은, 이 소름 끼치는 음악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니죠. 영원히 살아있을 사람을 애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번뇌하며 투쟁하는 인간은 과연 신적 존재를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작품 속에 묻어난다.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모차르트의 선율들도 귀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가벼운 소나타에서부터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피가로의 결혼’ 서곡, ‘마술피리’ 삽입곡, ‘레퀴엠’ 등이 극과 어우러져 녹아든다. 모차르트 역을 맡은 김준호의 연기도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천재 자체를 절실히 표현해냈다.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진지한 작품이지만 연출 의도와는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몇몇 장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늙은 살리에리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이호재)가 무대 위에서 분장할 때, 죽은 모차르트의 시신이 무덤에 아무렇게나 던져질 때, 살리에리가 내레이션을 하는 동안 배우들이 숨죽인 듯 멈춰 있을 때 뜻하지 않게 폭소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배우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여운마저 감소시키는데, 온전히 즐기려면 이 같은 ‘옥의 티’들은 잊어야 할 듯하다. 전훈 연출에 이호재 김준호 장지아 오승명 김재건 최상설 등이 출연했다.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