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박희선] 추억은 비타민이다
입력 2011-12-11 17:38
추억이란 무엇일까.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과거의 일들을 기억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환한 그리움이 더해진 것이 추억 아닐까? 살아온 많은 기억들 속에서 자주 꺼내 곱씹고 싶어지는 것,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부터 배어 나오는 과거의 어떤 사람, 장소, 혹은 생의 한 시절이나 계절, 어쩌면 유난히 행복했던 단 하루에 관한 그리움 같은 것말이다.
얼마 전,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선생님을 4∼5년 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2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래 전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너 기억하니? 내가 네 대학교 졸업식에 갔던 거? 난 그때 사진만 보면 그렇게 웃긴다. 내가 꼭 네 아버지 같은 거야.”
기억하고말고요. 지금 내 나이쯤에 이미 반백으로 머리가 셌던 선생님은 우리 아빠보다 더 늙어 보이셨잖아요. 추억을 공유한 사람끼리의 빙긋 웃음을 나누며, 아직도 그때 기억이 손으로 만져질 듯 생생한 데 놀랐다. 선생님과 내게 추억은 그렇게 사진 한 장이다.
첫 직장에서 만나 함께 여행할 기회가 많았던 선배와는 특별한 장소의 추억이 있다. 통영 소매물도 등대섬에 아무 계획도 없이 들어갔다가 텐트 치고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보이는 거라곤 바다밖에 없는 망망한 곳에 앉아서 완전한 일몰과 일출을 맞이했던 경험의 공유 때문에 그것이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국내 여행’이라는 데 아직까지도 이견이 없다. 그때를 떠올리면 대화는 언제나 “꼭 다시 가자”로 끝이 나는데, 기약 없는 약속이어도 즐겁다. 우리에게 추억 1등은 소매물도니까.
그러고 보니 나의 추억담은 많은 부분 여행으로 채워져 있다. 최근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겨울바다다. 지난 겨울, 나는 기획취재를 위해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바다 14곳을 쏘다녔다. 눈 내리는 섬, 하얀 갯벌, 꽁꽁 언 갯벌을 걸을 때의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 봄이 될 때까지 인장처럼 모래밭에 박혀 있던 조개껍질들, 오종종한 새 발자국들…. 이전에 익숙했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겨우내 만났다.
무엇보다 정말 매섭던 바람, 손발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얼얼했던 추위가 뇌에 각인되다시피 했는지 겨울이 되자 머릿속에 자동알림 장치라도 작동한 듯 내 마음은 곧장 바다로 향했다. 이제, 나에게 겨울은 바다다.
‘추억은 방울방울’이라고, 주인공이 유년의 나를 데리고 추억 여행을 떠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막 완성돼 내 손을 떠난 비눗방울처럼 눈부시게 반짝이지만 곧 꺼질 듯 아련한 추억이란, 우리가 때로 불행했던 과거의 많은 기억들을 뒤로하고 다시금 살게 하는 비타민제 같은 것이 아닐까.
올 연말에는 나의 소중한 추억 공유자들을 찾아서 오랜만에 손으로 쓴 연하장을 날려야겠다. 너를 생각하면 언제나 웃게 되는 장면이 있어, 그때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다, 사랑해, 라고 낯 뜨겁게 고백도 해줘야지.
박희선(생태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