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패관문학적 서술… 박형서 두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

입력 2011-12-09 17:38


예부터 민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꾼 사위’에 관한 설화가 있다. 어느 날 총각이 찾아와 자신의 선조가 재상에게 돈을 빌려 주었으니 돈을 받으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재상은 사실이라고 대답하면 빚을 갚아야 하고, 거짓이라고 하면 딸을 주어야 하는 곤경에 빠진다.

결국 총각은 재상 딸과 혼인하게 되는데 총각이 하는 거짓말은 송아지만 한 호박이 있다든지, 겨울에 찬 바람을 모아 두었다가 여름에 판다든지, 소한테 그물을 씌워 놓고 그물 밖으로 나오는 고기만 베어 먹으면 소고기를 언제까지나 먹을 수 있다든지 등 사리에 맞지 않으나 재미있는 내용들로 구현된다. 이 설화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는 재치를 구현함으로서 행색이 초라한 사람의 잠재된 능력을 긍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흔히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사위’에 비유되는 소설가 박형서(39)의 입담은 최근 출간된 두 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문학동네)에서 한 차원 더 일취월장한다. 수록작 8편 모두가 한결같이 소설 읽기의 묘미를 던져주지만 그 중에서도 올 3월 문인 100명이 ‘오늘의 소설’에 선정한 ‘자정의 픽션’은 감칠맛 뒤에 감겨오는 오묘한 여운을 던져준다.

‘자정의 픽션’은 어느 연립주택에 사는 가난한 부부의 냉장고에 있던 멸치들의 탈출기다. 더 정확히는 부부가 주고받는 멸치들의 탈출기인데 하필 왜 멸치인가. “국물을 낼 때 말이야, 물이 끓으면서 멸치들이 모두 냄비 한쪽으로 모이잖아. 왜 그런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바로 우정 때문이야. 멸치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정이 깊은 생명체 거든. 그들이 떠난 이유를 알아냈어.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던 거야.”(200쪽)

남편은 수제비 국물을 내기 위해 멸치를 찾으려다 실패한 아내를 위로할 겸해서 스스로 ‘이야기꾼 사위’로 변신해 멸치 떼의 리더인 성범수의 입장을 대변한다.

“성범수: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들 죽방멸치는 다른 멸치들과 요리법에서 차이가 난다. 인간들은 다른 멸치의 경우 볶거나 튀기거나 졸여서 한 점도 남김없이 먹는 데 반해, 우리들 죽방멸치는 오로지 국물만 우려낸 뒤 음식물 쓰레기로 버린다. 이게 모욕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모욕이겠는가. 그뿐 아니다. 국물을 내기 전에 저들은 우리의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다. 머리와 내장이 무엇인가? 지성과 영혼이 담긴 그릇이다. 그 신성한 부위가 살점과 척추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푸대접을 참아서는 안 된다.”(201쪽)

소설집에서 단연 의미 있게 읽히는 소설 가운데 하나인 ‘갈라파고스’ 역시 ‘성범수’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등장한다. 어느 겨울밤, ‘나’는 포장마차에서 한 청년을 만난다. 집까지 따라온 그는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외롭게 지내던 그는 길고양이 한 마리와 친해졌는데 성범수라고 이름 지어진 그 고양이는 방에서만 지내는 게 답답하니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외출은 점점 잦아지더니 급기야 그의 옷과 지갑과 시계를 자기 것처럼 사용하던 성범수는 그가 좋아하던 여자마저 차지해 버린다. 격노한 그는 성범수를 죽이고 시체를 다리에서 던져버린다. 집에 돌아와 불길한 예감에 떨던 그는 창밖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성범수를 발견한다. 성범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래, 한때 나는 고양이였다. 불우한 거리의 고양이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거둬들여 성범수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이고 오랫동안 보살펴주었다. 내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인가? 맞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나는 당신의 외로움이었다고, 그리고 이제 많이 진화했다고. 내 말 알겠는가? 시간은 저 혼자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늘 우리의 선택과 함께 흐른다.”(140쪽)

‘이야기꾼 사위’ 박형서의 입담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외로움과 수치심의 정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손톱을 세워 꾹꾹 눌러서 쓴 진짜배기 ‘핸드메이드 픽션’인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