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 성공의 열쇠는 언어다] 몽골 출신 엄마 둔 인형·도은이네 가족의 새 희망가
입력 2011-12-08 17:26
우리나라는 다문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다. 지난해 신혼부부 10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이다. 올해 1월 현재 결혼이민자는 21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의 자녀도 15만여명이나 된다. 단일민족인 우리나라는 그동안 결혼이민자 자녀를 ‘반쪽 한국인’으로 여겨 완벽한 한국인을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 사회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말과 우리 문화만을 가르쳤다. 이들이 갖고 있는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이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 부모 출신국 언어와 문화를 가르친다면 글로벌 인재로 자라나서 국제화 시대에 우리나라를 이끄는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다.
“호르당 버서드 헐러 이데레(어서 일어나 아침 먹어라)!”
“자, 에제(예 엄마).”
“다히아드 자항 온트발 볼로흐귀요(좀 더 자면 안 돼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요즘 인형(10·경기도 부천남초 3)이네 집 아침 풍경이다. 인형이 엄마 바트겔레 나차그도로즈(38·부천 심곡본동)씨는 몽골 사람이다. 예전에는 여느 엄마처럼 우리나라 말로만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말이 서툴렀던 바트겔레씨는 자장가와 동요를 컴퓨터로 들려줄 만큼 우리말만 고집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사람과 외모가 거의 같아 말을 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그런데 입을 열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엄마가 몽골말을 쓰면 혹시 아이들이 우리말을 서투르게 해 놀림이라도 받을까봐 걱정이 돼 몽골어를 일절 쓰지 않았던 것.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일어나라’ ‘공부해라’ 같은 간단한 문장은 영어로 했다. 몽골에 있을 때 대학에서 몽골어와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아이들에게 영어 조기교육을 했던 것. 그런 그가 아이들에게 영어 대신 몽골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올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부터다.
그는 “아이들이 여름방학 때 몽골에 다녀온 뒤부터 몽골말을 배우고 싶어 했다”면서 함박 웃었다. 요즘은 아이들을 위한 교재도 직접 만들어 본격적으로 몽골말을 가르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쉬운 말은 몽골말로 하고, 단어를 하루에 10개씩 외워 쓰게 하고 있다.
인형이 아빠 황해연(42)씨는 “아이들이 몽골말을 배우면서 새로운 꿈도 갖게 됐다”고 뿌듯해 했다. 조기 입학해 오빠 인형이와 학년이 같은 도은(9·부천남초 3)이의 꿈은 선생님. 도은이는 “선생님이 돼서 몽골에 가서는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치고, 우리나라에선 몽골말과 문화를 알리겠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도은이는 지난 여름방학 때 몽골에서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을 달렸으며, 게르(몽골 전통가옥)도 구경했고, 수태차(몽골차)도 맛있게 마셨다고 자랑했다. 아직 도은이가 알고 있는 몽골말과 문화는 아주 적은 것이지만, 그런 도은이를 바라보는 바트겔레씨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2001년 서울에 오면서 교사의 길을 접었던 바트겔레씨. 딸이 가다가 만 엄마의 길을 이어주겠다니 기쁠 수밖에 없을 터.
박주영 선수를 좋아해 축구선수가 되겠다던 인형이도 “아빠 나라와 엄마 나라가 사이좋게 살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나서고 있다. 인형이는 “몽골은 칭기즈칸의 나라로 옛날에는 힘이 셌지만 지금은 어려워져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럼 외교관이 돼야 하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엄마가 말하자 인형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외골수인 도은이에 비해 인형이는 축구선수와 외교관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몽골말만큼은 열심히 배우고 있다. 바트겔레씨는 아이들이 몽골국가(國歌)도 곧잘 부른다고 자랑했다.
어려서부터 학원을 3, 4군데씩 보내는 우리나라의 사교육 열풍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바트겔레씨는 “주변에서 다 보내니까 좀 불안하긴 한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교육열이 뜨거운 한국 엄마들을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다는 그는 “지난여름 몽골에 갔을 때 뭐든 천천히 하는 몽골 생활이 답답하게 여겨졌던 걸 보면 한국사람 다 됐다”며 호호 웃었다. 지난달 중순에는 시어머니가 계신 충남 금산에 가서 300포기나 되는 김장도 했다. 처음에는 김치가 매워서 잘 못 먹었지만 지금은 김치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할 만큼 입맛도 변했단다.
바트겔레씨는 남편 황씨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2000년 9월 처음 만났다. 태권도 5단인 황씨가 태권도 시범단 일원으로 그곳에 왔을 때 통역을 맡았다. 바트겔레씨는 황씨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해 호감을 갖게 됐다고 했다. 황씨는 결혼 상대자를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하고 ‘시부모 부양은 못 한다’고 못 박는 한국 여성들에 비해 바트겔레씨가 순수해서 끌렸다고 했다.
2002년 황씨와 결혼한 바트겔레씨는 “남편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결혼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고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까지 두 사람이 함께 작은 가게를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정리했다고 한다. 바트겔레씨는 요즘 작은 회사의 통·번역 일을 하고 있고, 황씨는 대부 상담을 하고 있다. 황씨는 “생활력이 강해 경제적인 도움도 크지만 아내 덕에 봉사활동을 하게 돼 삶의 보람도 느끼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황씨는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교육후원회’ 후원사업부 부장으로 홍보업무를 맡고 있다.
남편 칭찬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바트겔레씨는 “퇴근한 뒤 몽골말을 가르쳐야 해 시간도 모자라고, 아무래도 엄마가 가르치다 보니 느슨해져 진도도 잘 안나간다”며 안타까워했다. 엄마 나라 말을 가르쳐주는 부천무지개주말학교가 집 근처에서 열리지만 몽골어반이 없다. 경기도 내 몇몇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도 엄마 나라 말을 가르치는 ‘언어영재교실’이 있지만 몽골어반은 개설돼 있지 않다. 바트겔레씨는 주변에 몽골에서 온 엄마들이 꽤 많은데 왜 몽골어를 가르치는 곳은 없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 했다.
그래서 황씨 부부는 여름방학 때마다 남매를 몽골 외가에 보내 몽골어를 익히게 할 생각이다. 아이들은 겨울방학 때도 가겠다고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견디기 어렵기 때문. 이번 겨울방학 때 몽골에 갈 수 없다는 엄마 말에 잠시 실망했던 도은이는 “그동안 몽골어를 빨리 배워 외할머니와 외삼촌 외숙모 사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인형이는 “엄마 친척이 몽골에 많아 정말 좋다. 내년 여름방학 때는 축구공을 갖고 가서 사촌들에게 축구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바트켈레씨는 몽골은 대학 학비가 이곳보다 싸기 때문에 그곳에서 대학을 보낼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했다. 30년 후쯤 성 김 주한 미국대사처럼 양국을 잘 아는 빼어난 외교관이 돼 있는 인형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도은이도 엄마 나라와 아빠 나라를 오가며 활동하는 교육전문가로 이름을 날릴지도 모른다.
부천=글 김혜림 선임기자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