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세대’ 아픔과 좌절] 덫에 걸린 청춘… 다단계에 빠졌던 어느 여대생의 눈물

입력 2011-12-08 17:12

김주현(가명·23·여)씨는 지난 8월 초까지 ‘거마대학생’이었다. 거마대학생은 서울 거여·마천동 일대 불법다단계 업체에 의해 집단수용돼 활동하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을 일컫는다. 김씨는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뛰었다. 그러나 거액의 빚과 신용불량자 꼬리표만 남았다.

8일 경기도 안산시 중앙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한 순간 실수로 20대가 다 끝난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 남자 때문에…”=인터넷 채팅이 발단이었다. 2010년 봄 인천의 한 전문대를 휴학한 김씨는 등록금과 학원비를 벌기 위해 집 근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PC방 카운터에서 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성이 ‘안녕’이라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 남성은 김씨를 알고 있는 듯했다. 친구의 친구 행세를 했다. 김씨는 이 남성과 채팅을 하다가 밥을 사준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만났고, 또래였지만 씀씀이가 크고 준수한 외모, 깔끔한 매너에 호감을 갖게 됐다. 김씨는 몇 차례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돈을 벌기 위해 휴학 중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 남성은 기다렸다는 듯 “직장을 소개해 주겠다”며 거여동 부근으로 김씨를 데려갔다.

번듯한 건물과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업체 직원들의 말은 매력적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월 1000만원은 너끈히 벌 수 있다고 했다. 김씨를 데려간 남자도 매월 최소 500만원은 번다고 했다. 업체 직원들은 돌아가면서 김씨를 현혹했다. 입사하면 주어진다는 개인책상, 컴퓨터, 전화기도 ‘잘 나가는 직장인의 꿈’을 연상케 해 김씨를 흔들었다. 김씨는 “당시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와 비슷해진다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 최면의 시간이었다”=김씨는 며칠 뒤 그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게 됐다. 상급자에게 개인 신상이 들어있는 서류를 받아 그것을 토대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가 쌓이면 채팅으로 ‘안녕’이라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번번이 들통이 났다. 지인을 끌어들이는 것도 “정신 차리라”는 핀잔만 받고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7∼8명이 쪽잠을 자는 숙소 생활은 곤욕이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차례로 씻고 식사당번이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출근했다. 낮은 직급이어서 책상과 전화기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씨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인터넷에서 친해진 사람 등과 오후 10시까지 입씨름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보다 어린 여성 2명을 가입시켰고 회사 요구대로 사채로 회사에서 판매하는 고가의 이불 등을 구입했다. 덕분에 가장 낮은 직급에서는 탈출해 ‘2단계’가 됐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사채가 900만원이 넘었다. 김씨는 네일아트를 배워야 한다며 부모님에게 250만원을 타내 사채 이자를 냈다. 김씨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를 속이고 괜찮을 거라는 자기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헤어 디자이너의 꿈=김씨는 지난 8월 초 휴대전화 요금을 빌리기 위해 공중전화로 고등학교 동창 이수진(가명·여)씨에게 전화했다. 휴대전화 요금이 80만원이나 연체됐고 비상금까지 모두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일도 못했다. 이씨는 오후 7시쯤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서 김씨를 만났다. 이씨는 “안절부절못하며 30분마다 공중전화로 ‘누구와 어디서 만나고 있으며 언제 복귀하겠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고하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씨는 김씨의 만류에도 경찰에 신고했고, 가족들과 함께 김씨를 눈물로 설득했다. 이씨는 김씨의 작은아버지와 숙소로 가 김씨의 짐을 챙겨오기도 했다.

김씨는 경기도 안산시의 휴대전화 조립공장에 다니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사이에서 하루 10∼12시간 악착같이 일하고 있다. 친척들이 돈을 빌려줘 사채는 해결했지만 헤어디자이너의 꿈은 잠시 접었다. 김씨는 “빚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부모님께 타낸 돈도 갚아야 새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