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학교 활로를 찾는다] ‘한국어 학교’ 없으면 조선족 언어·문화도 위기
입력 2011-12-08 14:24
중국내 조선족학교가 위기다. 학생수가 급감하면서 최근 20년 새 90% 이상이 문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조선족이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새롭게 정착한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 등의 도시에는 조선족학교가 거의 없다. 따라서 대도시에선 한 세대만 지나면 민족 정체성이 상실되고 한국어를 아예 못할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에 지난달 중국 옌지(延吉)와 칭다오(靑島), 상하이지역의 조선족학교를 둘러봤다. 더불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마을도 돌아봤다.
지난달 17일 오후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시 청양실험2소학(교) 정문 앞. “마마(어머니)” “빠바(아버지)” “나이나이(할머니)”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몰려나오며 마중 나온 부모에게 반갑게 달려간다. 그러나 부르는 소리는 ‘엄마’ ‘아빠’ ‘할머니’가 아닌 중국어다. 조선족인 허성옥씨의 5학년 아들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다. 이 학교는 한족학교. 전체 학생 3300여명 가운데 조선족이 600명이 넘는다.
“별 수 없어요. 한국말을 제대로 배울 틈이 없으니, 그냥 몸에 밴 거죠.” 칭다오에서 10여년째 사업을 하는 한인 전모(50)씨는 “조선족의 자녀라고 해도 대부분 한국말을 못한다”고 귀띔했다.
한민족이지만 중국 국적인 조선족은 현재 192만명이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1992년 한국-중국 수교 이후 60만명 이상이 칭다오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廣州), 톈진(天津) 등 대도시와 연해도시로 이주했다. 결국 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랴오닝(遼寧) 등 동북3성(省)에는 조선족학생 수가 급감했지만 대도시에선 교육 수요가 크게 늘었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는 조선족학교가 거의 없다.
사실 톈진과 베이징에는 ‘새별’과 ‘장백’이라는 이름의 조선족학교가 각각 1곳씩 운영돼 왔다. 1993년과 1994년 개교했지만 모두 경영난을 겪으며 10∼11년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중국을 통틀어 동북3성 밖에 있는 조선족학교는 칭다오의 청도정양학교뿐이다. 그러나 이 학교 또한 유치원과 소학교만 있고 학생수도 각각 300명에 불과하다. 중·고교는 별수 없이 한족학교로 진학해야 한다.
지난해 딸을 졸업시킨 조선족 최경화(38·여)씨는 “아이가 우리글과 문화를 배울 수 있어 좋았으나, 중학교는 남들처럼 한족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칭다오에 사는 조선족의 숫자는 대략 20만명. 조선족 인구가 비슷한 옌지시의 경우 조선족학교 수가 17곳(소학 9곳, 초중 7곳, 고중 1곳)에 이른다.
“물론 조선족학교가 더 있다 해도 아이를 무조건 이 학교에 보내지는 않겠죠. 학비나 선생님들의 학습능력 등을 참고할 겁니다. 하지만 아예 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칭다오의 조선족 사업가 김모(42)씨는 “넓게 보면 현재 대도시 스무살 미만 조선족 중에 한글을 제대로 읽거나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광저우(14곳)와 베이징(8곳) 등 큰 도시에 65곳의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모두 주말에만 운영돼 한계를 안고 있다는 평이다. 또 전체 5800여명의 학생은 조선족보다 한국인 주재원 자녀가 더 많다.
중국 대도시에서 조선족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만나는 조선족마다 입을 모았다. 또 조선족학교가 있다고 해도 일부러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가 적지 않다고 일러줬다.
다행히도 조선족학교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학교설립에 대한 희망을 키우고 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시인 홍순범씨는 지난해 한 사이트에 “지성인들과 기업인들의 민족적 양심으로 담대한 탐색을 선도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상하이에서 만난 한 조선족 변호사도 “만약 (조선족)학교가 세워진다면 아이들을 보내겠다. 돕는 방안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상하이한인회의 한 임원은 “조선족학교를 세우는 일은 민족교육뿐 아니라 조선족 가정의 해체를 막는 시급한 일”이라며 “조선족 기업가가 앞장서고 한국 기업과 한인들이 협력하면 뜻을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내 회족과 만주족은 900만∼1000만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십년 만에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모두 잃어버렸어요. 지금 그들의 문자를 해독하는 이는 노인이나 학자들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 선양(瀋陽)과 칭다오의 조선족학교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전북대 박용진(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조선족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그러나 대도시의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다른 민족과 같은 신세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며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하이=글·사진 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