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다시 보다] 극우주의 테러 그후 노르웨이… 광기가 할퀸 우토야섬 ‘관용의 장미’는 활짝
입력 2011-12-08 14:11
섬은 최근까지 일반에 개방되지 않았다. 끔찍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슬픔을 간직한 노르웨이 우토야섬(Utoya)을 찾았다.
이곳에서 지난 7월 22일 극우주의 노르웨이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총기 난사로 무려 69명이 희생됐다. 이슬람 혐오주의자이며 다문화주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브레이비크는 노동당 캠프에 모인 청소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다. 노동당이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유에서다.
우토야섬은 수도 오슬로에서 북서쪽으로 40㎞ 떨어진 트리프요르드 호수에 있는 여러 섬 중 하나다. 선착장에서 섬까지는 배로 불과 5분. 선착장 한쪽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고, 주변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장미가 놓여져 있었다. 장미는 노동당의 상징꽃이다.
섬은 노르웨이 노동당 청년회 소유의 사유지다. 여름에는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페리가 다닌다. 당시 브레이비크는 경찰복을 입고 가방에 총기를 넣은 채 페리에 올랐다. 관광객 틈에 섞여 유유히 섬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다 된 겨울초입. 한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우토야섬으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예약해놓은 3∼4인용 빨간색 고무보트를 빌렸다. 노르웨이 청년이 보트를 운전했다.
짙은 구름 아래로 놓인 작은 섬은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였다. 호수 한가운데 보석처럼, 푸른 소나무와 은색 자작나무가 초겨울의 기운을 뿜어냈다.
배에서 내려 돌계단을 올라가니 빨간 글씨로 ‘우토야’라고 쓰인 하얀색 본부 건물이 보였다.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온 곳이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 섬은 청소년 캠프가 열렸던 날 그대로 정지된 듯 음산했다.
본부 건물 옆으로 갈색 건물, 그 뒤쪽으로 섬에서 가장 큰 도로가 있고, 도로 뒤 숲 속에 넓은 캠핑장이 자리했다. 캠핑장 뒤 매점 유리창에는 ‘우토야 : 노르딕 파라다이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창고 밖에는 그날의 스케줄이 붙어 있다. ‘18시 축구, 22시30분 디스코.’ ‘15:30∼16:30 강연이 있으니 모일 것’ 여름 캠프의 간식 텐트인 ‘우토야 와플’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피크닉 테이블은 모두 접혀져 야외 창고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축구도 디스코도 할 수 없었다. 브레이비크가 섬에 발을 내딛은 순간, 섬은 더 이상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브레이비크는 섬에서 무려 70분을 활보하며 총을 쏘았고, 캠프에 참여했던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거나 야외 텐트 속에 숨어 있던 아이들은 피해가 적었고, 나무나 바위에 숨었던 아이들이 주로 희생됐다.
섬에는 ‘사랑의 길’이라 불리는 산책로가 있다. 숲을 따라가면 호숫가 절벽으로 향한다. 테러범의 추격을 피해 일부는 이 길을 달려 안전을 위해 막아놓은 펜스까지 넘어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다른 이들은 아예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무작정 헤엄을 치는 아이들마저 브레이비크는 타깃으로 삼았다. 당시 물에 뛰어들었던 아이들 중 몇 명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학교’라고 적힌 갈색 건물로 향했다. 브레이비크의 총격이 가해지는 동안 47명이 이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숨어 있었다. 이날 죽음의 공포로 떨어야 했던 청소년들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아났다.
건물은 잠겨있었다. 섬을 돌아다니는 내내 인적은 없었지만 섬 입구에 포크레인 한 대가 서 있었다. 선착장에 물어보니 복구 작업을 위해 섬에 오가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고무보트를 운전해준 마그너스 한센은 “당시 사건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막상 섬에 와보니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고 평화롭다”고 말했다. 그는 “테러 이후 오슬로 분위기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며 “사람들은 차분해졌고 다시 평화를 찾았다”고 덧붙였다.
섬이 개방된 뒤에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선착장에서 배를 빌려주는 우트비카 캠핑의 아콘토 인베탈링은 “보통 하루 5명 정도가 섬에 들어간다. 대부분 희생자 가족들”이라고 전했다.
잔혹한 사건에 분노하기보다 차분하게 대처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사건 이후 지지율이 올랐다. 노르웨이는 우토야섬을 평화의 상징으로 재건할 예정이다. 섬에 추모비가 세워지고, 캠핑장과 축구장 농구코트가 만들어질 것이다.
브레이비크의 폭탄 테러로 같은 날 8명이 희생된 오슬로 정부종합청사 주변에는 노란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직원들은 다른 건물로 옮겨갔고 폭탄이 터진 건물은 복구 중이다. 청사 주변에서 만난 오슬로 시민들은 “그냥 정신 나간 한 테러범의 소행일 뿐 대다수의 노르웨이인은 다문화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토야섬(오슬로)=글·사진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