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재부흥을 바라며… “교회밖 세상에 소통·위로·희망을 노래하라”

입력 2011-12-08 14:07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불통의 시대’ ‘상처의 시대’ ‘절망의 시대’를 연상케 된다. 주전 6세기 예레미야 시대의 국가사회적 코드도 이와 같았다. 오늘 우리 시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당시 예레미야는 친바벨론주의자라는 지독한 오해를 받으면서도 끝내 눈물로 소통과 위로와 희망을 노래했다. 그 노랫말에는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애 2:11)라는 표현이 담겨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교회 100년은 반봉건, 반외세, 건국(建國),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며 이 민족과 소통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개인 문제, 가정 문제, 교회 문제에 머물면서 오히려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별명이 있다. 눈물의 선지자이고, 친바벨론주의자이다. 왜 눈물의 선지자인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 공성전(攻城戰)을 끝낼 때,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성 약탈명령’을 막고 싶어서 울었고, 약탈명령 후에는 못 막아서 울었다. 두 번째는 ‘제사장 나라 경영’을 리셋하고 싶어서였다. 무슨 말인가? 첫째, 그동안 지키지 않았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날 수를 계수한 대로 ‘예루살렘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제사장 나라 법 실행을 의미한다. 둘째, 예루살렘 땅이 안식하는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 ‘율법 재교육’을 받는 것이다.

정말 예레미야가 친바벨론주의자일까. 언뜻 예루살렘 쪽에서 70년을 생각하면 예레미야는 친바벨론주의자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앗수르 제국이 520여 년 동안 아시아의 주인 노릇했다. 이후 페르시아 200년, 헬라 300년, 로마 1000년이다. 이렇게 5대 제국 변동사에서 볼 때 바벨론 제국의 수명은 너무 짧다. 예루살렘 안식 70년, 바벨론 교육 70년, 바벨론 제국 수명 70년,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경영 리셋 과정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동시에 정해졌다. 이렇게 예레미야의 시대를 향한 눈물은 소통, 위로, 희망의 노랫말을 만들게 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예레미야의 고백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 진심 때문에 울었고 이 진심을 알리고 싶어서 울었다. 이것이 그의 눈물의 더 깊은 본심이었다.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교회의 사유화, 기복주의 신앙, 교회의 분열,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참 뜻으로부터 멀어진 것에서 비롯됐다. 21세기, 아니 오늘의 한국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성경적 기독교’로 리셋해야 한다. 예레미야가 품은 하나님의 진심을 가슴에 담고.

조병호 성경통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