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입력 2011-12-07 18:14
연말이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얼마 전부터 전화 영업사원들의 전화가 평소에 비해 잦다. 가장 많은 대출 전화부터 자동차보험 가입 권유에다 최근에는 설문전화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휴대전화로는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전화로도 연결된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또는 “안녕하십니까. 정진영님”으로 시작되는 전화는 내가 끊지 않는 한, 듣든 말든 자신들의 매뉴얼을 기계음처럼 읽어 나간다. 대체로 친절하게 응대하는 편이지만, 바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금방 끊는다.
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때로는 ‘버럭’ 화를 내며 내 감정대로 행동한다. 상대와 얼마 동안 통화하는지 ‘초 단위’로 기록이 매겨져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가능한 빨리 끊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눈길을 끄는 자료를 내놨다. 수도권 시민 3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2%가 ‘여성 감정노동자에게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81%가 ‘이들이 소비자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거나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응답했다. 감정노동이란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1983년 처음 개념화한 것으로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특정한 감정상태를 연출하는 것이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 유형’을 말한다. 노동자의 감정을 관리해서 상품화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조업 종사자 400여만명을 제외한 서비스업 관련자 530여만명이 감정노동자에 속한다. 대표적인 직종은 전화교환원, 전화영업사원, 백화점 및 대형 할인매장 근로자, 창구업무 담당자, 요식업소 종사자 등이다. 전문직을 제외한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감정노동자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감정 노동의 근간인 ‘매뉴얼’을 중요한 경영 수단으로 삼는 대기업의 수직 계열화된 할인판매점 및 제과, 커피숍 등이 확산되면서 감정노동은 이제 우리 산업의 중추가 되고 있다.
문제는 감정노동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에도 부작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감정노동의 가장 큰 역기능은 감정의 상품화와 감정 관리가 노동의 일부분이 됨으로써 발생하는 스트레스로 인한 노동자의 비인간화다. 외부 자극에 가감 없이 반응하는 생물학적 현상이 감정인데, 감정노동자들은 이를 훈련과 교육, 강제를 통해 조절함으로써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 보통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는 ‘부적합한 정서’를 노출시킨다.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지난해 서비스직 종사자 3096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후유증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26.6%나 됐다. 노동자들의 정서적 장애는 결국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며, 기업 경영 측면에도 심대한 타격을 미친다.
혹실드는 그의 저서 ‘감정노동(Emotional Labor)’에서 과잉 감정노동의 장기화는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유발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로부터도 외면 받아 기업 경영은 실패한다고 설명했다.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배꼽인사나 고객이 들어서면 한 사람의 선창에 의해 모든 종업원이 따라하는 요란한 인사. 쪼그려 앉아서 주문을 받는 행위, 고객의 잘못까지도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종업원 등 우리 주변에서 늘 접하는 이들의 ‘미소와 친절’은 고개의 각도, 시선의 위치, 표정의 처리 방법까지 철저히 조련된 결과물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감정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관련 제도를 마련하고, 기업은 인간 경영 측면에서 과도한 감정노동을 강요하지 않아야겠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친절해야 돼, 그게 그 사람들 직업이니까’라고 생각했던 나를 포함한 다수의 소비자들부터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감정노동자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연습을 먼저 해야겠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