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즈려밟고 선자령까지 5㎞ 고개 돌려보면 雪國天地非人間

입력 2011-12-07 17:34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수의 경치가 훌륭한 곳은 강원도 영동을 첫째로 꼽는 것이 마땅하다”며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는 이중환은 영동에서도 경포호수가 위치한 강릉을 산수화의 으뜸으로 꼽았다. 지금은 7개의 터널과 최고 90m 높이의 교량 33개로 이루어진 새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편안하게 서울과 강릉을 오갈 수 있다. 하지만 강릉 가는 길은 아무래도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을 겨울에 넘어야 제맛이다. 우리나라에서 눈이 가장 먼저 내리고 가장 많이 내리는 곳으로 유명한 대관령은 해발 832m. 지난주 내린 폭설로 백두대간 고갯길인 대관령은 은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분기점인 대관령은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강릉과 평창의 기후가 매우 대조적이다. 오죽했으면 “영서 날씨가 추워 옷을 껴입고 영동에 갔다가 쪄 죽고, 영동에서 덥다고 헐렁한 차림으로 영서에 갔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을까.

겨울철 강릉 여행의 첫 번째 감동은 대관령에서 선자령(1157m)까지 이어지는 5㎞ 길이의 눈꽃 트레킹.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하지 않은데다 무릎 깊이로 쌓인 눈과 눈꽃이 핀 크고 작은 전나무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출해 동화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 듯 황홀하다.

옛 대관령휴게소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KT통신중계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야생화가 만발하는 산길은 전나무를 비롯한 침엽수와 나목으로 변한 활엽수들이 서둘러 눈꽃을 활짝 피웠다. 반원형의 데크로 단장한 새봉 전망대는 설경이 멋스런 백두대간은 물론 강릉 시가지와 동해바다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뷰 포인트.

새봉에서 선자령까지 2.5㎞는 비교적 완만한 코스로 수십 기의 풍력발전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은빛 설원은 계곡을 넘어 삼양대관령목장의 초지로 이어진다. 선자령의 거센 눈보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대관령목장의 축사는 달력에 나오는 알프스처럼 아름답고 평화롭다.

대관령 옛길도 선자령 가는 길에 버금가는 눈꽃 트레킹 코스로 이름 높다. 옛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 표석에서 강릉 방향으로 몇 굽이를 돌면 신사임당 사친시비가 나오고, 다시 몇 굽이를 더 내려가면 반정 전망대가 나온다. 반정(半程)은 대관령 옛길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대관령 옛길은 모두 7.87㎞로 반정에서 대관령박물관까지 6.04㎞ 구간과 반정에서 선자령 아래에 위치한 국사성황당까지 1.83㎞ 구간이 있다.

강릉 사람들은 대관령을 ‘대굴령’이라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데굴데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으로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大關嶺)이 됐다고 한다. 반정에서 무릎 깊이로 쌓인 눈길을 헤치고 3㎞쯤 내려가면 주막이 나오고 다시 1.5㎞를 더 하산하면 하제민원터. 산적 때문에 통행객 10명이 넘어야 통과시켜 주던 일종의 검문소로 강릉의 해산물과 평창의 농산물을 교역하던 선질꾼은 이곳에서 무리를 이뤄 고개를 넘었다.

하제민원터 아래에 위치한 원울이재는 울고 넘던 고갯길. 영동으로 발령받은 관원들이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자 세상 끝에 당도했다는 설움에 눈물을 흘리고, 떠날 때는 정 때문에 울며 넘었다는 고개다. 원울이재를 넘자 이 골 저 골을 수놓은 눈꽃이 거센 바람에 날려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눈꽃 트레킹이 끝나면 짙은 커피향이 그리워지는 법. 정동진에서부터 주문진까지 강릉의 바닷가에는 커피숍들이 즐비하다. 동전 몇 개 넣고 뽑아먹는 자판기를 비롯해 주인이 직접 원두를 갈아 뽑아내는 250여 개의 전문 커피숍에 이르기까지 강릉은 로맨틱 커피 순례지로 유명하다.

강릉이 커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우리나라 커피 1세대이자 일본식 핸드 드립의 최고수 커피장인으로 불리는 보헤미안의 박이추씨를 비롯해 대규모 커피공장을 운영하는 테라로사의 김용덕씨가 강릉 커피숍의 원조격. 여기에 박이추씨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앞다퉈 전문 커피숍을 열면서 강릉은 커피축제까지 개최하게 됐다. 특히 강릉항은 횟집보다 커피숍이 많아 커피거리로 불리는 곳. 겨울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짙은 커피향을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이 낭만적이다.

강릉 여행의 대미는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선교장에서의 고택체험. 선교장은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수대에 걸쳐 건축한 우리나라 유일의 장원. 102칸에 이르는 본채를 비롯해 부속건물과 가람집 초가까지 포함하면 300칸이 넘는 만석꾼의 살림집이다.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이 집 앞까지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壯)에 들어서면 맨 먼저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活來亭)이 반긴다. 활래정은 선교장의 주인이 기거하던 공간으로 발갛게 말라붙은 연꽃과 연못가에 뿌리를 내린 배롱나무가 선교장의 역사를 말해준다.

보호수로 지정된 10여 그루의 500∼600년생 소나무를 비롯해 수백 그루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선교장에는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동별당,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와 열화당을 비롯해 우리나라 고택 가운데 가장 긴 23칸의 행랑채가 눈길을 끈다.

눈 덮인 백두대간이 거울 같은 경포호수에 가라앉고 경포대에 다섯 개의 달이 뜨면 묵향 그윽한 선교장의 방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길에 나섰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며 시·서·화를 남겼던 방들로 솔향과 묵향, 그리고 커피향이 어우러져 강릉 겨울밤의 운치를 더한다.

강릉=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