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집… 친구는 강아지와 사계절… 가수 장필순, 제주로 간 까닭은
입력 2011-12-07 09:48
“사실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저는 제주도에 가 있는 거뿐이거든요.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어서 편안하고. 그게 다인데 막 궁금해하시니까 어떻게 얘기해줘야 되는지도 고민인 거예요.”
국내 대표 여성 포크가수 장필순(48)은 무게감에 비해 대중적 관심을 못 받는 가수다. 그는 지난 30년간 음악 이외의 것으로 주목받아본 적이 없었다. 콘서트를 앞두고 모처럼 모습을 드러냈는데 저마다 제주 생활부터 파헤치려드니 그는 성가셨는지 모른다.
“저야 뭐 대외적으로 많이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게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로 이슈가 되는 건 마음에 안 들어요. 음악이 뒷전에 가버리잖아요.”
그는 치장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햇빛보다 바람에 그을린 듯한 얼굴은 화장기가 없었고, 까만 생머리는 쇄골까지 떨어져 부스스 흔들렸다. 흔한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아서 기타를 치려고 기른 오른손 손톱 말곤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몇 년 뒤에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가 제주에 정착한 건 2005년 7월 말이었다.
-주민등록상 거주지도 제주인가요.
“네. 도민이죠. 작년인가 투표 한 번 했어요.”
-마음이 힘들어서 제주에 갔다고 그러던데 질병이나 이별, 송사(訟事) 같은 일을 겪은 건가요.
“그렇게 특별하게는 아니고요, 그냥 전반적인 상황이 그랬어요. 좀 쉬고도 싶었고.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좋진 않았고. 제일 그거는, 서울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서울이 고향인데도요?
“제가 세련된 생활에 워낙 적응을 잘 못하는 편이기도 하거든요. 작은 예를 들면, 저는 아직 컴퓨터를 거의 만질 줄 모르고 TV도 잘 안 봐요. 그런 것들이 점점 불편해지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지쳤다고 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네요.”
-도피인가요.
“글쎄요, ‘도피’ 하면 뭔가 숨는 기분이 드는데 그건 아니거든요. 제가 옮겨간 것뿐이죠.”
-너무 깊은 곳으로 가서.
“(웃음) 그러게 말이에요.”
그는 제주도 서북부인 제주시 애월읍의 산기슭에 살고 있다. 반경 1∼2㎞에 이웃이 없고, 하루 두 번 버스가 서는 마을에서도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장필순은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
-왜 그리 외진 집을 골랐나요.
“여기서 벗어난 동기가 너무 복잡한 것들이 힘들어서였으니까. 좀 한가한 데를 찾고 싶었고. 거기다가 바다 쪽은 많이 우울해진대요. 저는 산 쪽이라서 제주지만 눈도 내려서 쌓이고, 겨울이면 며칠씩 갇혀 있기도 해요.”
-무섭지 않나요.
“무섭기보다 처음 1년 정도는 어색했다고 해야 하나요. 원래 겁이 좀 없어서. 주변에 네온등도 없고, 요즘 같으면 6시만 되면 깜깜해요. 가끔 동물 울음소리 정도 나고. 그래서 뭘 해도 집중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바느질, 뜨개질 같은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망가진 이불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꿰매서 덮고.”
-처음부터 정착할 생각이었나요.
“정착이라기보다는 ‘간다’였어요. 오래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제주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었죠. 못 견디시는 분은 굉장히 힘들어한대요. 제가 봤을 때도 너무나 불편한 게 많고.”
-불편한 점도 있나요.
“제주라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요새는 이상기온 때문에 여름에 제습기 없으면 못 살 정도로 습해요. 저는 마당에 꽃을 심었는데 낭만적인 거 같지만 굉장히 과정이 힘들거든요. 제주는 너무 돌이 많아서 뭐 하나 심으려면 호미로 되는 일이 없어요. 항상 곡괭이랑 삽이 있어야 되고.”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얻는 게 뭔가요.
“자연을 보는 거 아닐까요? 분명히 여기서도 새는 울었는데 제가 못 듣고 살았던 거 같아요. 근데 거기는 정말 종일 새가 울어요. 밤에는 노루도 울고. 아침이면 나가서 내가 심어놓은 꽃을 본다든가. 제주는 따뜻하니까 지금도 계속 꽃이 피어요. 그래서 제주가 개발된다는 소식 들으면 걱정되죠.”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에 동참했었나요.
“거기서 공연하는 친구들 있어서 가서 보기는 했어요. 제가 워낙에 그런 거엔 적극적이지 못한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프고 속상한 부분도 있긴 한데 그 이전에 전 항상 ‘나나 잘하자’ 하거든요.”
-대중없이 사는군요.
“원래 예민한 편이라서 뭐 하나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해요. 그래서 뭘 하려고 잘 안 해요. 거기선 뭘 하더라도 간간이 하니까 저는 아주 잘 맞는 것 같아요. 아직 부모님이 여기 계시니까 그거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 말고는.”
-안 말리시던가요.
“‘조심해라’ 하시던데요? 워낙에 제가 독립적으로 살아서. 마음으로 걱정하시겠지만 노래 시작할 때부터 많이 믿어주셨어요.”
2남 1녀 중 둘째인 그는 서울예대 재학 중이던 1982년 그룹 ‘소리두울’로 데뷔했고, 89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새’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등이 많이 불렸다. 그의 6집은 올해 초 2000년대 국내 최고 명반으로 뽑혔다. 장필순은 이런 음악적 찬사가 남의 것인 양 사는 듯했다.
-대중에게서 잊힐까 봐 두렵지 않나요.
“막연한 믿음인지 몰라도 사라진다고는 생각 안 해요. 저 역시 얼굴도 못 본 분들의 음악을 부모님을 통해서 들었고. 저는 제 존재보다 제가 불렀던 음악의 존재감이 컸으면 좋겠어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궁금했다.
-장필순도 아이유처럼 3단 고음을 낼 수 있나요.
“이름은 들어서 알지만 그 친구가 몇 단 고음을 내는지도 모르고. 제 음역대가 굉장히 낮아요.”
-고음을 내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나요.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찾아가는 게 제일 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엔 다들 너무, 너무 많이 지르셔서.”
-허스키한 음색은 여자 목소리로는 별로인데 곱게 바꿔보려고 하진 않았나요.
“아뇨. 나서부터 목소리가 그래서요. 학창시절엔 남학생 앞에서 얘기도 잘 안 했어요. 말하면 꼭 리액션이 와요. ‘목소리가 원래 그러냐’ ‘감기 걸렸냐’ 이런 식으로. 내 얘기는 안 듣고 목소리에 집중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여자한테 예쁜 목소리는 예쁜 눈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교회 활동을 하면서 콤플렉스를 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또 음악을 만날 수 있었고.”
그는 2009년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대중적 기독교 음반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네’를 냈다. 장필순은 “좋을 때보다 힘들 때 신앙의 힘을 많이 얻는 것 같다”고 했다.
-기독교인은 참 신앙을 얻었을 때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데 장필순도 예수를 만났나요.
“제가 느끼는 건, 좀 힘든 세상이지만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좋은 데 데려다 준 것 같아요. 그가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기분이 들어요. 그 정도로 저는 만족해요.”
-아직 미혼인데, 독신주의자인가요.
“독신주의는 아니지만요, 음악 시작할 때부터 워낙 남자들하고만 해서 아직 별로. 제가 이제 또 (우리 나이 40대에서 50대로) 앞머리가 올라가잖습니까? 근데 그런 질문 받으면 사실 별로 할 말은 없어요. 너무 유치한 표현인데, 그냥 음악이 나랑 같이 이렇게 오래 있으려고 그랬던 거 같아요.”
-부모가 성화를 내진 않습니까.
“지금은 접으셨죠. 제가 우왕좌왕하고 그랬다면 달라졌겠지만. 흡족하지 않더라도 제 결정을 인정해주시는 편이에요.”
-죽음도 제주에서 맞을 생각인가요.
“함부로 얘기하기가 참 두려운 게, 말해놓고 다른 결과가 오는 건 내키지 않거든요. 지금은 아무튼 아주 좋아요. 정말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되는 게 아니라면 계속은 있을 것 같아요.”
장필순은 다음날 제주로 돌아갔다. 사흘 뒤 전화했을 때 그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4마리 중 2마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한 마리는 나서부터 아토피인데 친오빠가 기르던 걸 데려왔어요. 요즘은 동물들도 똑똑해져서 사람보다 나은 동물이 많은 것 같아요.”
그가 기르는 영국 혈통의 황금색 개 ‘골든 리트리버’의 이름은 개똥이였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