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이야기] 한국교회 찬송가의 시작

입력 2011-12-07 17:55


한국교회의 찬송가 역사는 19세기 말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다. 본격적인 찬송가의 출판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언더우드(H.G.Underwood)와 알렌(Allen)이 1894년 함께 펴낸 ‘찬양가’이다. ‘찬양가’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고 서울에서 발행됐다. 모두 117편의 찬송이 4성부의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이 중 8편이 한국인 작사로 돼 있다. 특이한 것은 영국과 미국계통의 찬송가 외에 한국인이 작사한 찬송가들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작사한 찬송가들은 질적인 면에서 우수하지 못하고 단순, 소박한 것들이지만 언더우드가 처음부터 한국인의 작품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언더우드는 또한 한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사를 번역하면서도 가능한 한 한국말의 억양과 서양찬송의 멜로디 사이의 장단과 고저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찬양가’는 최초로 규모를 갖춘 찬송가로서 원래 서울 중심의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감리교의 존스가 미국으로 가 1년 이상 서울로 돌아오지 않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단독 출판했다. 감리교는 교리상의 문제(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통일 문제-여호와, 아버지) 등을 이유로 이 찬송가 사용을 거부하고 1862년 아펜젤러(Alice R.Apeenzeller)와 존스가 공동으로 ‘찬미가’를 발행했다. 또한 1895년 평양주재 장로교 선교사인 리(Graharn Lee)와 기포드(M.H.Giffeot) 목사가 ‘챤셩시’를 출판했고 이외에도 윤치호 편의 ‘찬미가’(1905년)가 비공식으로 발행됐다. 여기에 애국송과 황제송이 여러 편 들어 있으며 애국가가 문서상으로 처음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새문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로 조직되었고 14명의 한국 교인과 두 명의 장로로 시작되었다. 백홍준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돌아와 새문안 교회에 교적을 두었을 때, 매일 새벽이면 기도를 하시고 나지막한 소리로 “주 예수 애워, 주예수 애워”를 부르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 사랑 하심은’의 뜻으로 중국어로 번역한 찬송을 한국어 번역찬송이 나오기 전에 한국식으로 발음해 부른 것이며 중국 찬송가를 번역해 서북지방에 보급시킨 시초라고 볼 수 있다.

1885년 미국과의 수교 이후부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학교와 병원 등을 세우고 사회사업을 통한 복음전파에 힘썼다. 이때부터 한국에 찬송가라는 새로운 음악장르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스(J.Ross)목사와 맥킨타이어(J.MaCintyre)목사가 있어서 이들에게 전도 받은 한국인들이 중국 찬송을 배워왔다는 기록이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여러 개의 찬송가를 나누어 사용하다가 하나로 통일하자는 의견에 합의해 1908년에 ‘찬송가’를 조선예수교서회 발행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익숙한 곡조들이 많이 들어있고, 가사도 초창기에 비해 많이 세련돼졌다. 그 후 20여년간 각 교회에서 이 최초의 하나가 된 찬송가를 큰 불편 없이 사용했다.

찬송가가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1886년 이후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비롯해 경신, 정신 등의 학교가 세워지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배재학당의 교과목을 보면 성경, 영어 등과 더불어 ‘찬가’라는 이름의 음악과목이 배정돼 있었으며 음악수업은 1887년부터 시행됐다. 교재는 서양의 찬송가였다. 학생들은 당시 음악교사였던 뱅커(D.A.Banker)와 아펜젤러를 따라 영어나 우리말로 찬송가를 한두 소절씩 따라 불렀는데 이러한 수업은 점점 다른 학교에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나라 정규음악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김기원(관동대음악학부교수, (사)기원오페라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