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철휘 (9) 혼돈의 대학생활… 주님, 영혼의 문을 노크하다
입력 2011-12-07 17:21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가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서 같이 간 체육과 동기들 자취방에 끼어 살기도 했다. 혹은 가정교사로 일하며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학원에서 강의도 했다. 하지만 대우가 형편없었다. 겨우 차비 정도만 주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화장품 외판원 교육까지 받은 적이 있다. 누나들을 따라 다니면서 화장품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 체면에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 적도 있다. 내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3일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당시 너무 배고프고 굶주리던 시절, 지혜 아닌 지혜를 얻은 게 하나 있다. 배고플 때는 라면에다가 막걸리 한 사발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적인 청춘 시절이 아니었다.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초라한 청춘이었다. 고난과 역경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6·25 한국전쟁 중에 우리 친척 한 분이 몸이 아팠는데 어느 교파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소위 예수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분을 가운데 몰아넣고 마구 때렸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 나름대로 안수기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병을 낫게 해 준다며 안수 기도를 하는 도중에 그 아저씨가 그만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마을에는 예수쟁이들이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척 아저씨의 죽음으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내가 학교 친구들을 따라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 교회에 가려 하면 우리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교회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나를 단속하시곤 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남녀 교제가 활발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딘가 몸이 많이 아프거나, 죄를 많이 지은 아주 나쁜 사람이거나, 연애를 하기 위해 불순한 목적을 갖고 다니는 것으로 부모님은 여기셨다. 이 같은 집안 분위기와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나 역시 기독교는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의 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일이 있었다. 제일 친한 같은 과 김충용이라는 친구가 하루는 내게 말했다. “학장님 방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는데 같이 참석하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하신 분들이 돌아가면서 강의도 하시니까 그냥 좋은 말씀 듣는 교양강좌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자.”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가장 많이 이해해주고 밥도 가끔 사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렇지만 난 친구의 권유를 몇 번 거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선지 기도회에 참석하게 됐다. 유상근(명지대 설립자) 장로님 주도로 교수와 학생들 50여명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었다. 찬송도 부르고 주기도문도 낭송하는데 나만 혼자 멀뚱멀뚱 쳐다보는가 하면 교수님의 15분 설교를 교양강좌로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내 영혼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