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화분 한개씩 모아… 나만의 ‘시크릿 가든’

입력 2011-12-06 17:40


아파트 베란다 꽃대궐 꾸민 블로거 강선영씨

하양 분홍 주황 빨강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임파첸스, 작고 하얀 꽃이 점점이 박혀 있는 엑사쿰, 긴 꽃대가 가녀린 목마가렛, 공중에 매달린 채 보라색 꽃을 피운 버베나, 수줍은 듯 주황색 꽃이 고개를 숙인 베고니아…. 강선영(38·충북 청주 비하동)씨의 아파트 베란다는 한겨울인 요즘 꽃 대궐을 이루고 있다.

“하하. 정남향집이라서 겨울에 햇볕이 잘 들어 꽃이 활짝 핍니다. 대신 여름에는 꽃이 별로 없어요.”

지난 주말 오전, 고속도로를 1시간 40분 달려가 만난 강씨는 베란다 꽃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웃었다. 2006년 입주했을 때 인테리어업자가 주인한테 묻지도 않고 거실 섀시를 다 뜯어놓았더란다. 그 만큼 베란다 확장 공사가 일반화돼 있던 때다. 항의하는 그녀에게 시공사는 ‘베란다 확장공사를 공짜로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베란다정원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그 유혹을 뿌리쳤다.

호기롭게 시작한 베란다정원이었지만 처음에는 화분 열댓 개가 전부였다. 돈을 들여 한꺼번에 꾸미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하나 둘 ‘초록식구’들을 늘려갔다. 그렇게 꾸며선지 베란다정원은 크고 작은 토분 350여개가 옹기종기 모여 꽃밭을 이루고 있다. 물레방아나 기암괴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지만 그만큼 정겹다.

베란다정원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는 꽃의 80%가 임파첸스다.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임파첸스. 그 꽃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시어머님 댁에서였다. 너무 예뻐 품어왔지만 얼마 안가 죽었다. 시어머니께 죄송해 말도 못하고 끙끙 앓던 그녀는 우연찮게 한 농원에서 그 꽃을 다시 만났다. 시들시들한 탓에 공짜로 얻어 온 임파첸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삽목을 해서 화분 수도 늘려나갔다. 두세 개는 병충해로, 네댓 개는 과습(過濕)으로 떠나보내는 동안 임파첸스를 속속들이 알게 됐단다. 요즘 그녀는 과습에 약한 임파첸스를 배수구멍 없는 함석주전자에 심어 키울 만큼 임파첸스 키우기에 관한 한 달인이 됐다.

“지난겨울 혹한에도 베란다는 10도를 내려가지 않았어요. 볕도 잘 들지만 꽃들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시골집에서 맡았던 그런 흙 내음이 느껴집니다. 가습기 같은 건 물론 필요 없고요.”

겨울철 필수품으로 꼽히던 가습기, 요즘 그 살균제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선영씨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베란다정원을 가꾸라고 ‘강추’했다. 가습효과도 뛰어나지만 정서 교육에도 그만이란다.

“어른들한테도 도움이 됩니다. 어린 시절 불우했다고 생각했는데 베란다정원을 가꾸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충북 청원군 미원 깊은 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너나없이 어려웠지만 시골살림은 더 팍팍했을 터. 팔남매 중 일곱째였던 그녀의 유년은 물질적으로는 남루할 수밖에 없었다. 꽃을 가꾸는 동안 산에서 캐와 심었던 앞뜰의 야생화, 아버지가 드시고 난 빈 소주병에 꽂아 두었던 들꽃을 기억 저편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행복감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떠오르더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는 그녀는 외로움을 심하게 타거나 우울증을 앓는 이들에게 꽃을 가꾸라고 권한다. 처음부터 ‘너무 잘 기르겠다’고 덤비지 말라는 말과 함께. 계절마다 예쁜 화분 한두 개를 들여놓고 보면서 즐기는 것부터 시작하란다. 정성을 쏟다 보면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죽지 않게 되면 그때 화분을 늘려 가면 된다고 한다.

‘내가 키운다’에서 ‘같이 산다’로 바뀌었다는 그녀의 일상은 베란다정원과 맞닿아 있다. 퇴근해 집에 돌아와 처음 하는 일이 꽃과 눈 맞추고 물주는 일이다. 그래서 가족여행도 새벽에 출발해 밤에 돌아오는 당일치기만 한다. 주말이면 베란다정원을 궁금해 하는 블로그 이웃들을 위해 3시간 사진 찍고, 2시간 포스팅한다. 이웃들은 선영씨의 베란다정원을 ‘어니랜드’라고 부른다. 그녀의 아이디 ‘어니스트’를 따서 지은 별명이다. 이웃이 2000명이 넘는 블로그의 주인장이다 보니 유혹의 손길도 꽤 많은 편.

“소품을 줄 테니 사진을 찍어 올려 달라기도 하고, 공동구매 제의 업체들도 있지만 절대 ‘노’입니다.” 꽃 사이에서 상냥하게 웃던 선영씨는 블로그 얘기가 나오자 단호해졌다. 한번은 임파첸스 해충인 응애에 효과적인 농약을 블로그에 올렸다. 상품이 대박이 났다. 제조업체에서 수소문 끝에 그녀를 알아내고 감사의 선물로 그 농약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단숨에 거절했다는 그녀는 최근 ‘공동구매로 수억원을 벌어들였다’는 파워 블로거 뉴스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고 했다. 얼마 전 이웃이 ‘청정 블로그’로 뽑아줬다고 자랑한 그녀는 ‘파워 블로그’가 된 것보다 더 좋다며 다시 ‘상냥한 선영씨’로 돌아왔다.

청주=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