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동상이몽을 넘어 비전으로
입력 2011-12-05 17:59
미국 집회에 갔을 때 빌 게이츠가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가 보았다. 원래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는데 1975년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꿈을 꾸고 회사를 설립했다. 박물관에 가보니까 최초의 컴퓨터부터 삼성과 애플의 최신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 혁명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우리 교회 예배당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100개가 넘었다. 회사가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모든 사무실과 회의실마다 화이트보드나 흑판이 걸려 있었다. 순간순간 좋은 아이디어나 비전이 떠오르면 적으라고 한 것이다.
거기에 글귀가 하나 쓰여 있었다. “우리가 이윤만을 추구할 때는 항상 갈등과 어려움과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비전을 추구하고 나갈 때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안내를 하는 사람이 이런 설명을 해 주었다. “사랑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라면 비전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회사가 이익만을 쫓았을 때는 난관에 처하기도 하고 직원끼리 갈등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비전을 추구하고 쫓아갈 때는 항상 형통하고 회사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이라는 말이 있다. 장군과 병사가 함께 같은 꿈을 꾸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함께 비전을 바라보며 위대한 꿈의 신세계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소명과 비전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서로 기득권이나 이권만을 바라볼 때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결국 서로 적이 돼 공격을 하다 내부고발과 법정고소까지 가는 것을 본다. 심지어는 평생을 섬겨왔던 지도자까지도. 동상이몽 때문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보면 세종이 비전을 바라보며 관노였던 장영실에게 관직을 내린다. 그러나 조정 신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명분, 이권만을 바라보며 극렬하게 반대한다. 세종은 관복을 반납하고자 편전 앞마당에 엎드려 비를 맞고 있는 장영실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말한다. “나의 치세는 길어야 30년이나 너의 기술은 100년, 아니 500년, 아니 어쩌면 더 길게 살아남아 이 나라를 지탱해 줄 힘이 되어 줄 거다.”
세종은 이권이나 이윤이 아닌 먼 미래의 비전을 함께 바라본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소명의 감격에 서지 못하고 같은 비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나 교계가 이권이나 교권을 바라보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서로 이권이 맞을 때는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조금 틀어지면 오히려 서로 적이 돼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동상이몽을 넘어 소명의 감격 위에 서서 같은 비전을 바라보자.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눈앞의 이윤과 이권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심장의 고동소리를 울리며 10년, 100년, 아니 1000년을 이어갈 비전을 바라보고 있는가.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