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후지모토 도시카즈] 나의 지리산 종주기
입력 2011-12-05 17:47
“눈 앞에서 포기한 천왕봉… 일본에 돌아가면 ‘한국의 식물기행’ 책을 내야겠다”
11월 중순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다. 북한산 등산을 계기로 한국의 산에 흠뻑 빠진 나는 2년4개월 사이에 도봉산 불암산 소요산 용마산 아차산 청계산에 이어 설악산 대청봉까지 올라갔다. 여세를 몰아 도전한 지리산이었지만 1박3일 일정이 무리였는지 관절통 때문에 최고봉인 천왕봉을 눈앞에 두고 완주를 포기했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했다. 이렇게 웅대한 구름 바다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 우뚝 솟은 한국 고유의 상록수, 구상나무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지리산 곳곳에서 본 마가목의 빨간 열매도 인상적이었다. 돌아올 때 들른 기슭의 식당에서 난생 처음으로 마가목 열매를 담근 술을 맛보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꽃이나 식물에 관심이 많다. 식물학자도 아닌 내가 유심히 한국의 식물들을 보게 된 것은 NHK 방송국에서 국제방송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에 거주하는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었던 나는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일본의 이모저모를 소개했다.
“일본 열도에 봄이 왔습니다. 봄의 도래를 알리는 서향나무의 그윽한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습니다.” “장마철이 다가왔습니다. 방송국 앞에 있는 비파나무 열매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도쿄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금목서 꽃이 아주 향긋합니다.” “추분입니다. 추분이 오면 어김없이 피는 꽃, 석산이 올해도 피었네요.”
여기에 나온 서향나무, 비파, 금목서, 석산은 일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식물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과연 한국에 없는 것일까? 사전에 나오는 것을 보니까 있을 텐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일까? 일본과 한국의 식물상(植物相)의 차이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꽃과 나무는 어떤 것일까?
나의 궁금증은 그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을 찾을 때마다 한국의 식물들을 유난히 열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일본의 가을을 상징하는 금목서는 올 가을 부산의 주택가에서 만났다. 향기에 끌려서 가보니 담 너머 두 그루의 금목서가 향긋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석산도 올 가을 잠실의 올림픽공원에 피어 있는 것을 봤다. 비파나무도 부산과 김해의 주택에 심어져 있는 것을 봤다. 완도에 재배하는 농원이 있다고도 들었다. 사향나무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산딸나무다. 산딸나무는 일본말로는 야마보시(山法師)라고 한다. 산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입은 하얀 두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내가 청초한 산딸나무 꽃을 한국에서 만난 것은 청계산의 산마루에서였다. 예상치 않았던 만남에 넋을 잃고 한동안 지켜보았다.
뜻하지 않은 나뭇잎사귀를 만난 것은 종로 삼가의 뒷골목에서 동료들과 소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였다. “망개떡이요! 망개떡! 추억의 망개떡이요!”라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기에 호기심에 얼른 사다 먹어 보니까 놀랍게도 그 떡은 나에게도 추억의 떡이었다.
일본에는 단오절 때 가시와모치(柏餠)라고 해서 떡갈나무에 싼 떡을 먹는 습관이 있는데 규슈(九州) 등 남쪽에 떡갈나무 대신 망개 잎으로 싸는 지역이 있다. 규슈의 외딴섬에서 태어난 나도 어렸을 때 단오절이 다가오면 산에 가서 망개 잎을 따왔다. 도쿄에 오래 살아서 망개떡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추억이 종로 뒷골목에서 되살아나다니.
‘I have a dream.’ 미국의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 ‘한국식물기행’이라는 책을 일본에서 내는 것이다. 자연을 싫어하는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만 일본 사람도 꽃과 나무와 자연을 무척 좋아한다. 일본인을 위한 한국여행 가이드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꿈은 갖는 것 자체가 즐겁다. 그리고 봄이 오면 천왕봉에 재도전해 식물기행을 계속하고 싶다.
후지모토 도시카즈 (경희대 초빙교수·전 NHK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