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0) 기독교와 사회변화 <1>혼례·장례
입력 2011-12-04 17:56
“조혼은 자식 죽이는 일…” 악습 타파 나서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기독교적 가치는 한국 사회 여러 분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고(故) 홍이섭 박사는 ‘혁명’이라 불렀다. 광의로 볼 때 기독교는 한국 개화(開化)의 동력이자 주체였다. 물론 기독교가 사회 개혁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조직체이거나 그것을 위한 일차적인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자연스럽게 한 사회를 변화시켜 갔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 변화는 기독교 복음이 가져온 ‘떨어진 이삭,’ 곧 낙수(落穗)였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서구 사회 형성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크리스토퍼 도우슨의 지적처럼 기독교적 가치는 서구 문화 형성의 모체였다. 크리스틴 폴도 지적했지만 기독교가 가르친 이웃 사랑의 윤리는 서구 사회에서 섬김과 배려, 손대접(hospitality)의 전통을 심어주었고, 일과 직업에 대한 새로운 가치는 타울러(John Tauler)에서 시작되어 루터에게서 꽃핀 소명론으로 발전했다.
이견이 없지 않지만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근검, 절약, 하나님의 영광 추구는 격렬한 노사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교육, 감옥개선운동, 구제와 자선의 가치를 고양시켜 주었고 윌리엄 윌버포스로 대표되는 기독교 인간관은 노예제도 폐지를 가져왔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에도 이 같은 사회 개혁과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의 사회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방편은 교육과 의료였다. 각처에 학교가 설립되면서 서양문화가 소개되고 신식교육과 교육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병원이 설립되면서 미신적이거나 민간 의료에 의존하던 우리 사회에 현대의학이 도입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와 서양 의술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구습과 미신적 굴레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교육과 의료는 개화의 방편이었다. 민주의식을 함양하였고 사물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안목을 길러주었다. 또 기독교 복음은 자연스럽게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을 가져왔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주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에 주재하면서 기독교 윤리관과 서구적 합리주의에 기초하여 우리 사회의 폐습이나 문제점들을 보게 되었고 이의 타파를 권면했다.
내한한 선교사들이 관찰한 가장 중요한 한국 사회의 문제는 첩을 두는 복혼(複婚) 혹은 중혼(重婚)의 문제였다. 따라서 중혼한 이들이 교회 직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주제였다. 윌리엄 베어드가 쓴 ‘기독교회는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용납할 것인가(Should Polygamists be admitted to the Christian church?)’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문서이고 장로교공의회(Presbyterian Council of Korea)의 최초 연구 보고서였다.
기독교회는 조혼의 악습과 중혼의 비윤리성을 깨우쳐 주었다. 조혼의 악습에 대해 초기 감리교인으로서 동대문교회를 시무한 노병선은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에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에서 혼인하는데 큰 폐단이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일직 혼인하는 것이라…어찌 하자고 십사, 오세도 못된 어린 아헤를 짝을 지어주니…자식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요, 둘째 폐단은 혼인을 부모가 작정하여 주는 것이라…서로 만난 후에 합당치 아니한즉 잔약한 여인은 여간 불합하더라도 그 남편을 따라가지마는 사나이 놈은 제 주먹 힘이 든든한 것만 믿고 사태를 돌아보지 않고 그 아내를 욱닥이며 두다리며 사불여의 즉 본처를 내어 쫓고 첩을 얻는다. 심지어 살육이 난다”고 지적했다(3권 16호·1899. 4. 19).
당시 결혼제도의 모순은 두 가지인데 조혼과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결혼이었다.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부모의 의사가 자녀의 혼인을 주도했다. 기독교는 이런 폐습을 보면서 이의 타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1901년 9월에 모인 장로교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조혼의 악습과 결혼 시 돈을 주고받는 소위 지참금 관례에 대해 토의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도신문’(1901. 8. 8)에서는 ‘결혼문답’란을 통해 이의 시정과 계몽을 시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혼례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점은 기독교 복음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한국교회는 장례의 폐습도 일깨워 주었다. 한국의 장례는 이능화의 지적대로 지나치게 번잡하고 복잡했는데(厚葬成風), 허례허식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는 “머리를 풀고 우는 것이나, 베옷 입고 삼년상 지내는 것과 장사지낼 때 과한 음식을 차려놓고 배불리 먹는 것도 없애야 할 풍속으로” 보았고, “부모상을 당하여 애통할 제 풀어헤치고 얼굴을 씻지 아니하며 좋은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옛 사람의 유전을 지켜 내려오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밝은 이치와 대단히 반대가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허례허식적인 의식을 고쳐 장례의 참뜻을 살려보려는 교회의 시도가 제사폐지론과 함께 오해를 야기한 일도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장례의식은 점차 수용되어갔다.
불교도였던 이능화는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장지선택(厚葬擇地), 지나친 허례(許多禮說) 혹은 풍수미신을 폐기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크리스토퍼 도우슨은 한 사회의 기독교 문화의 척도는 그 시대의 관혼상제가 얼마나 기독교적으로 변화되었는가에 있다고 했는데, 1900년 이후 기독교적 가치가 점진적으로 수용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