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조선 백성은 왜 시민이 되지 못했나

입력 2011-12-02 17:38


지난 3년 현대의 사회학자는 조선이란 과거의 공간을 헤맸다. 그를 이끈 건 현실의 고민이었다. 한국에서 갈등은 왜 타협될 수 없는가. 답을 찾아 개화기로, 조선시대로 회귀한 사회학자는 그곳에서 200∼300년 전 조선의 ‘인민’을 만났다. 한 번도 주체가 되지 못한 통치의 대상. 인민은 1세기 전 느닷없이 근대라는 낯선 시간으로 떠밀려 나왔고, 시민이 되지 못한 채 다시 일제시대로 끌려들어갔다. 송호근(55)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탐구는 미완으로 끝난 인민의 시민화, 이곳에서 시작됐다. 3년 고심의 흔적을 최근 ‘인민의 탄생’(민음사)으로 묶어낸 송 교수를 지난 30일 만났다.

-사회학자가 조선을 말했다.

“역사를 말하되, 지극히 사회학적 질문에서 출발했다. 국회와 거리의 시위대를 보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두 목소리에는 접점이 없지 않나. 왜 양측이 공유하는 가치의 면적이 이렇게 좁은가. 공론장(公論場·생각을 문자로 교환하고 설득하는 의사소통의 장)이 분열돼 있다는 게 이유인데, 그러면 ‘왜 분열됐나’를 물어야 하지 않겠나. 현대의 공론장만 갖고 분석하니 상식적이거나 단기적인 분석밖에 안 나오더라. 그래서 기원을 찾게 됐다. 한국에서 공론장이 탄생할 때 잉태된 문제, 다시 말해 발생론적인 결함이 뭐냐를 보여줘야 오늘을 이해할 수 있다.”

-분열된 공론장이 조선에서 시작됐다는 건가.

“우리 사회 공론장이 가진 결함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성격과 관련 있다. 조선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대단한 지식국가였다. 지식이 국가를 통치하고, 국가가 다시 지식을 통제했으며, 통치 이데올로기(성리학)가 곧 종교였다. 정치, 종교, 교육이 하나로 완벽하게 통합된 사회. 사대부(士大夫)는 선비(士)와 벼슬아치(大夫)를 합친 말 아닌가. 향촌의 사(士)가 세상에 나가면 통치자인 대부(大夫)가 되고, 물러나면 선비가 됐다. 당쟁도 결국 누가 정통인가를 묻는, 지식논쟁이자 통치논쟁이었다. 물론 그들은 한문을 썼다. 한문 공론장에 인민이 낄 여지는 없었다. 19세기 초부터 양반 공론장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당시 인민에게는 공론장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는 그런 상태에서 찾아온 것이다. 준비도, 기획도 없이.”

-책에서 조선을 지탱한 세 가지 축(정치, 종교, 교육)이 붕괴하는데 한글이 기여를 했다는 분석을 했는데.

“한글이 한 역할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통치의 목적으로 한글을 창제했겠지만, 문자는 상상력의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지배층과는 다른, 딴생각을 할 공간이다. 한글 덕에 정치, 종교, 교육 각 분야에서 양반의 한문 공론장에 대항할 작고 소박한 참호들이 만들어졌다. 민족어(한글)는 보편어(한문)가 허락하지 않았던 생각, 즉 홍길동의 율도국(이상향) 같은 상상을 허락했다. 종교의 경우에는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한글교리서가 보급됐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향촌 질서를 잡던 향회라는 자치기구를 평민이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들은 한글을 사용해 일종의 언문 연판장 같은 걸 돌려서 의견을 물었다. 언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조선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줬느냐. 이들이 적극적으로 평민 담론장을 형성했느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민은 언제 시민 담론장을 갖게 된 건가.

“갑오경장(1894∼1896) 때 신분제가 폐지되고 한글이 국문으로 채택됐다. 신분제 속박을 벗은 자유로운 인민이 한글을 들고 시민공간으로 나온 건 이때부터다. 시민 담론장이 시작된 거다. 신소설, 신문이 발간되고 근대학교가 세워졌다. 이 과정이 조금 더 진행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거다. 불행히도 시민 담론장은 시작하자마자 봉쇄됐다. 일제 식민지배가 모든 걸 중단시켰다. 해방 뒤에는 전쟁이 났고 군부독재 하에 산업화가 시작됐다. 1910년 멈춘 그대로 20세기로 밀려간 거다. 대한민국 공론장의 발생론적 한계라는 게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역사학계에서 근대화를 추동하는 힘이 조선사회 내부에 있었느냐, 외부에 있었느냐 따라 입장이 명확히 갈린다. 인민이 시민이 되지 못했다는 건 조선의 근대가 수동적으로 시작됐다는 의미인가.

“조선 내부에 근대화의 싹이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이나 외부의 힘이 근대를 앞당겼다는 식민근대화론. 역사학계의 이런 접근법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식국가 조선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를 알려면, 조선을 지탱한 지식국가 조선의 축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조선에서 지식과 권력의 선순환 구조는 완강하고 견고했다. 그게 조선이 500년을 버틴 힘이자, 무너지는데 100년이나 걸린 이유였다. 만약 그 순환이 완벽하게, 끝까지 유지됐다면 즉 유교적 이상국가가 실현됐다면 조선은 절대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근대도 오지 않았을 테고. 조선은 19세기 세도정치로 인해 지식이 권력으로 옮아가는 순환이 끊겼다.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지식계급이 권력에 접근할 길이 차단된 거다.거기서 근대가 시작됐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19세기 초 밀려난 지식계급과 중인계급이 한글을 가지고 인민을 이끌 가능성은 없었던 건가.

“기억해야 할 건, 정약용 같은 실학자조차 유교적 이상국가의 꿈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에서는 19세기 초반 세도가의 횡포로 지식과 국가권력 사이에 겨우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근대가 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지식인이 성리학의 틀을 벗어던졌다면. 하지만 밀려난 변방의 지식인조차 성리학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중세가 무너질 때 지식계급 전체는 통치체계와 함께 몰락했다. 인민은 결박에서 풀려났는데, 인민을 끌어줄 지식인은 없었다는 얘기다. 실학자 최한기(1803∼1877) 정도가 알았을까. 그 많은 조선의 지식인 중 누구도 근대를 감지하지 못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기획되지 않은 근대. 그게 우리 근대가 가진 결핍이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