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경제雜說] 소주와 다문화

입력 2011-12-01 18:01


주말 오후면 아마 많은 직장인이 소주 한잔을 생각할 것이다. 마음 맞는 이들과 둘러앉아 기쁘게 나누는 소주 한잔이야말로 우리 서민들의 소박한 행복이 아닌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따뜻한 국물이 그리우니 안주는 찌개나 전골이 좋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소주를 마셨을까?

소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몽골에서는 소주를 ‘아라키’라고 불렀고 만주에서는 ‘이얼키’라고 했는데, 이는 모두 아라비아어인 ‘아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몽골인들이 아라비아까지 진출했다가 거기서 배워 온 소주 제조법을 다시 우리나라에 전한 것이다.

몽골이 우리나라에 전한 것은 소주만이 아니다. 소주 안주로 좋은 찌개나 전골도 그들이 전한 요리법이다. 몽골인들은 유목민족이다 보니 시간도 아끼고 번거로움도 줄이기 위하여 고기와 채소를 한 데 넣고 끓여 먹는 요리를 즐겼다. 만약 우리 선조들이 다른 민족의 문화라 하여 소주도 거부하고 찌개도 거부하고 기타 이것저것 거부했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는 무얼 먹고 있을까?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결혼 여성 등을 합해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가 200만명에 이르렀다. 하기야 요즘은 주변에서 다문화 가정의 여성이나 아동들을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국제결혼이 전체 결혼 건수 가운데 10%를 넘어선 지 오래다. 지난 3년간 다문화 가정의 학생 수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가 왜 외국인들까지 품고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복지 지원으로 정작 우리가 받아야 할 혜택이 줄어든다는 불만도 있다. 심지어는 외국인 노동자를 모두 추방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들의 대부분은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누구보다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이들이 다문화에 더 적대적이라는 이야기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종 증오라고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례가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이다. 히틀러가 집권할 때 독일 국민들에게 내건 공약은 바로 ‘빵과 일자리’였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충격으로 경제 회복이 어려워지자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정권을 위협할 지경이었다. 나치스는 그런 국민들의 불만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독일 국민들은 그런 나치스를 추종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자신들의 내면에서 점점 커져가는 불안감을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처럼 평범한 서민일 뿐이던 사람들이 경기침체와 실업의 고통에 너무 힘겨운 나머지 잔악무도한 인종 학살의 공범자가 되고 만 것이다. 굳이 옛날 옛적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 몇몇 나라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끔찍한 인종 범죄의 원인도 실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경제와 인종주의는 상관관계가 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또 그러다 보니 왠지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가 다른 누군가의 탓인 듯 미움이 싹 트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건 지금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의 대부분은 우리가 필요해서 부른 사람들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업장은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 이른바 3D 업종이다. 내년에 우리 중소기업들이 추가로 필요로 하는 외국인 노동력은 무려 11만명이나 된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상당수 우리 중소기업이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인데,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2018년이면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2026년에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고령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활동인구 비율은 줄어드는 데 반해 피부양 인구는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니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없이 과연 우리끼리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외국인의 복지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하느냐고? 그들은 이미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다. 그들의 경제적 소외와 열악한 복지 등의 문제를 방치하면 바로 그 지점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 우리들의 임금과 복지 수준을 저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