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독자 사은 퀴즈] 꽁트 속에 숨은 문학작품 제목 찾고 세계문학전집 받으세요
입력 2011-12-01 18:51
주말섹션 ‘And’가 지령 100호를 맞아 문학퀴즈를 마련했습니다. 지난해 2월 12일자에 실어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설맞이 문학퀴즈에 이어 두 번째 독자 사은 이벤트입니다. 이번 퀴즈의 형식은 ‘숨은 작품명 찾기’입니다.
전문 번역가 연진희씨가 쓴 콩트 ‘지상의 양식’은 퇴직 후에도 아파트 설비기술자로 일하며 자신이 부지런히 살아왔음을 자부하는 60대 아버지 규식과 대학 도서관 비정규직 직원으로 아직 부모 품에서 독립하지 못한 채 의기소침해 있는 30대 아들 상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일용할 지상의 양식을 구하느라 근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단편소설 속에는 고전 반열에 올라 있는 해외 문학작품 이름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단어 하나로 된 제목도 있고, 두 단어 이상의 구(句)로 된 제목도 있습니다. 문장을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어? 이게 작품명 아닐까?’하고 감이 올 겁니다. 답을 찾기 위해선 지금까지 출간된 270여권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목록을 참고해야 합니다.
힌트를 드릴까요? 예를 들어 이 콩트의 제목 ‘지상의 양식’은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작품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본문 1장의 두 번째 문장에 들어 있는 ‘말’이라는 단어는 장 폴 사르트르의 작품명에 해당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찾아내면 됩니다. 요령은 쉽죠? 지난해 퀴즈는 정답을 알아내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독자들의 원성(?)이 많아서 이번엔 난이도를 대폭 낮췄습니다.^^
이제 ‘지상의 양식’과 ‘말’을 제외하고 총 10개의 작품명을 찾아 해당 작가 이름과 함께 적어서 보내주세요. ‘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한글 표기법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기준입니다. 작품명과 작가 이름을 같이 써야 한다는 점, 잊지 마세요.
* 이 중 한 작품의 경우 제목은 똑같지만 저자는 서로 다른 2종의 책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저자를 그 중 누구로 쓰든 정답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정답을 찾은 독자는 이메일이나 우편에 본인 성명, 주소,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서 응모해주시기 바랍니다. 12월 13일 밤 12시까지 받겠습니다. 이메일 응모 때는 제목에 반드시 ‘100호 이벤트’라는 말머리를 달아주세요. 정답자 중 추첨을 통해 14명에게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응모기간: 2011년 12월 2(금)∼13일(화)
◇보낼 곳: (우편)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2번지 국민일보
편집국 특집기획부 김호경 기자 앞
(이메일) hkkim@kmib.co.kr
◇당첨발표: 12월 16일(금) And 지면 및 국민일보 쿠키뉴스
홈페이지(kukinews.com)
◇상품: 1등(1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권 세트
2등(3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권 세트
3등(10명)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1, 2’
◇협찬: 민음사
지상의 양식
1
아파트 설비기사의 소방교육이 끝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어제 소장은 소방교육 후 사무실에 들를 필요 없이 바로 퇴근하라고 말했다. 규식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부랴부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지 않은 반나절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벌써 계획이 잡혀 있었다.
현관을 열자, 퀴퀴하고도 정갈한 냄새가 규식에게 와락 안긴다. 옷가지, 음식찌꺼기, 젖은 빨래, 화분의 흙이 한데 뒤섞인 듯한 냄새였다. 그는 밥솥의 밥을 식은 국에 말아 훌훌 먹고, 낡은 면장갑과 큰 가위와 접이식 낚싯대를 배낭에 챙겨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 마당은 늦더위로 후덥지근했다. 규식은 면장갑을 천천히 끼며 쇠 난간 너머의 숲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올해 예순두 살이다. 그러나 탐욕스럽게 반짝이는 눈동자, 팽팽하게 번들거리는 갈색 피부, 팔다리에 붙은 불끈한 근육은 여전히 기세 좋게 타오르는 생기를 드러냈다.
규식은 성큼성큼 주차장을 가로질러 날렵하게 난간을 넘었다. 좁은 비탈길을 오르던 그는 명치가 조금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급히 먹은 밥에 체한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마른 낙엽들 틈에 갓 떨어진 생생한 밤송이들이 보였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밤송이에 가위집을 넣으며 하나하나 쪼갰다. 탱글탱글한 밤알이 톡, 톡, 떨어졌다. 바람이 나무들의 우듬지를 흔드는지 가지들이 잎을 흔들며 ‘솨솨’ 깊은 숨을 토했다. 하늘에서 밤송이와 밤알이 비처럼 투두둑 쏟아졌다. 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는 쇠스랑 같은 손가락으로 민첩하게 밤알을 추리고 삽처럼 넙적한 손바닥으로 밤알을 쓸어 모아 배낭에 부었다. 눈이 밝은 그는 손톱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규식은 가난한 소작농의 열 남매 가운데 다섯 째 아이였다. 늘 배를 곯던 어린 규식이 가장 부러워한 또래는 방앗간집 아들 명수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 땅딸막한 아이는 온갖 곡물로 만든 주전부리를 들고 다니며 자기 말을 잘 듣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특히 가을이면 집 앞 밤나무 아래로 아이들을 데려가 밤을 한 주먹씩 집어 가라며 한껏 뻐겼다. 그러나 명수는 학급반장인 규식을 그 패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 재미를 상민이가 알까? 쳇, 그 녀석이 뭘 알겠어.’
그는 한적한 길을 골라 계속 걸었다. 이따금 길에서 벗어나 두텁게 쌓인 낙엽을 낚싯대로 휘젓고 몸으로 밤나무 둥치를 쿵쿵 쳤다. 그때마다 가슴 아래쪽이 꽉 조이며 쿡쿡 쑤셨다.
며칠 전, 어둑한 새벽에 밤을 한 가방 모으고 돌아와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데, 상민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오더니 신문지에 쏟아놓은 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나처럼만 부지런히 살아. 이렇게 살았으니 집도 사고 너 대학도 보낸 거야. 도대체 날 닮은 데가 있어야지. 뻐꾸기가 내 둥지 안에 제 알을 물어놓았던 거야. 한심하다, 한심해.”
평소 재치와 입담을 자부하던 규식은 ‘팟’하고 터질 웃음꽃을 기대하며 ‘농담’이라는 꽃불에 불을 붙였다. 아울러 삼십대 아들보다 좋은 체력,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을 의지하지 않는 경제력, 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않는 부지런함을 자랑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껄이다 보니, 문득 100만원 월급에 대학 도서관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아들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네 나이에 대기업 공장에서 일했고, 퇴직을 한 뒤에도 아파트 설비기술자로 너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데……. 내 친구 자식들은……. 도대체 넌 언제 내 품을 떠날래?”
‘피이잇…….’ 밥솥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은 아침밥도 먹지 않고 굳은 얼굴로 출근해 버렸다. 아내는 아침부터 괜한 소리로 아들을 굶겨 보낸다며 규식을 탓했다.
‘나처럼만 살면 되잖아…….’
규식은 땅바닥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밤송이를 찾았다. 얼굴에서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아무리 더워도 이렇게 땀을 흘린 적은 없었다. 명치끝이 계속 아릿했다. 그는 배낭을 내리고 땅바닥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냈다. 순간, 규식은 구덩이 속으로 푹 꺼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귀안이 먹먹하다고 느낀 순간, 그는 자신의 몸뚱이가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2
“눌렀을 때 아픈 곳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창백하게 야윈 의사가 규식의 배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아, 아니, 네, 거기요.”
규식이 숨을 몰아쉬며 불안한 눈빛으로 의사를 보았다. 의사가 청진기를 규식의 배에 대며 골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어떻게 아프세요?”
“그러니까 1시 반쯤 산에서 밤을 줍다가 갑자기 기절을 했어요. 정신을 차렸는데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정말 죽을힘을 다해 집으로 왔지요. 내 평생 그렇게 땀이 난 적은 처음입니다. 마룻바닥에 물이 고일 정도로…….”
의사는 시계를 보더니 “두 시간 반이 지났군요. 통증은요?”라고 되물었다. 규식은 자신의 몸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자신이 아무도 상상 못할 큰일을 겪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욱신하게……. 그렇게 땀이 많이 난 적은…….”
“아버지는 체한 것 같다고 하세요. 그런데 배에 뭉친 곳도 없고…….”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상민이 입을 열었다.
“소화기 계통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장내과로 연락해 놓을 테니, 일단 응급실로 가세요.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규식은 아들의 팔에 의지하여 천천히 응급실로 걸음을 옮기며, “직장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다.
산에서 돌아온 규식은 마룻바닥에 쓰러진 채 몸에 불쾌하게 달라붙는 옷자락을 떼어내려 힘겹게 몸을 뒤틀었다. 그때 집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가까스로 집어 들자, “엄마?” 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규식은 “엄마 집에 없다”라는 말을 간신히 내뱉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규식은 몸에 닿는 손길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아들이 마른 수건으로 규식의 몸을 닦고 있었다. 아들은 규식의 몸을 일으키며 “병원에 가야 해요”라고 재촉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규식은 귀찮다는 듯, “그냥 체한 거야. 좀 쉬면 돼. 직장인이 이렇게 아무 때나 나오면 되냐”라며 손을 저었다. 상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체한 게 아니라니까요!”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규식은 상민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응급실의 젊은 의사들이 규식의 몸에 문어발 같은 기구를 붙이고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의사들은 어려운 용어로 검사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규식은 그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민은 초조한 얼굴로 의사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규식은 그저 두 가지만 묻고 싶었다.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살 수 있습니까?’
몇 분 후, 말끔한 중년 의사가 유쾌한 미소를 띤 채 탄력 있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아프세요? 언제부터 아프셨죠?”
그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느긋하게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명치가 욱신하게……, 내 평생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린 적은…….”
중년 의사는 ‘네, 네’하고 건성으로 대꾸하며 젊은 의사가 내미는 표를 확인했다.
“위치로 봐서는 확실하지 않아. 심전도는 심하지 않네. 수치가 높아? 그렇군. 초음파 사진은? 어, 여기하고 여기……. 심근경색이 확실하네. 당장 수술 준비해.”
의사는 규식과 상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심근경색입니다. 심장 아랫부분의 혈관이 두 군데 막혔어요. 다행히 꽉 막힌 게 아니라 혈액순환이 조금은 이루어졌던 거지요. 곧 조영술을 실시하겠습니다. 관상동맥에 관을 넣어 레이저로 혈전을 제거한 후, 혈관이 수축하지 않도록 스탠스라는 금속판을 삽입하는 수술이에요. 간단한 수술입니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지금 곧 수술을 하겠습니다.”
의사는 한결같은 경쾌한 목소리로 설명을 마치고는, 다시 탄력 있는 걸음으로 응급실을 나갔다.
어디선가 “김규식님 보호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민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 간단, 지체, 위험……. 규식은 의사가 던지고 간 말을 토막토막 되씹었다.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이미 늦었나? 위험하다고? 죽을 수도 있단 말인가? 이렇게 느닷없이…….’
규식은 손을 들어 눈가로 가져갔다. 검은 흙이 낀 두꺼운 손톱, 담뱃진이 누렇게 밴 검지와 중지. 진갈색 반점으로 덮인 손등. 굵직하게 솟은 푸른 핏줄.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손바닥. 그는 눈을 감았다. ‘이 손이, 이 몸뚱이가 한 줌의 먼지로?’
3
“내 평생 그렇게 땀을 흘린 적은 처음이야. 그렇게 땀이 나더라고.”
규식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평소의 조롱기 섞인 유들유들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병객들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처제와 동서는 네 번째 문병객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똑같은 말로 시작됐다. 그는 그 서두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얼마나 무섭고 중대한 사건이 닥쳤는지 암시하는 데 그보다 좋은 표현은 없는 듯했다. 이야기 중간에 이런저런 말들이 덧붙고 빠졌지만, 그 끝도 늘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사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몰라. 인간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결국엔 빈손으로 사라져. 욕심 없이,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해. 그게 행복이야.’
그는 죽음의 입구에서 깨달은 이 단순한 이치에 스스로 감동했다. 그는 삶의 한가운데 있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말을 이해할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아직 뭔가 다 말하지 못한 아쉬움에 긴 한숨을 쉬었다.
“언니가 하루 종일 형부 옆에 있어? 유치원은?”
“원장한테 얘기했어. 1주일 정도 못 나간다고. 저녁에는 상민이가 와. 내가 여기서 잔다고 해도 굳이 자기가 있겠대.”
“유치원 청소는 그만 둬. 어깨도 안 좋다며.”
“집에 혼자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어.”
아내의 지친 얼굴에 유순한 미소가 떠오른다. 단정한 몸가짐, 상냥한 눈빛, 부드러운 말투, 정성스런 손길.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내에게 보이는 호감에 뿌듯했다. 노인 환자들은 질투의 눈길로 부부를 흘깃거렸다. 그럴 때면 그는 “퇴원하면 당신에게 정말 잘할게”라며 아내에게 조용히 속삭이곤 했다.
“형님, 새로운 인생을 얻으셨네.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두셨어. 상민이가 형님을 살렸다면서요.”
“마침 상민이가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난 소화제나 먹으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상민이가 조퇴까지 해서 날 병원에 억지로 끌고 온 거야. 조금만 늦었으면 죽었을 거래.”
“그럼 상민이는 매일 밤 여기서 자고 출근하겠네요, 형부?”
“잠을 못 자지. 간호사들이 밤새 들락날락하며 피도 뽑고 링거액도 바꾸거든. 새벽 3시쯤에는 심전도 검사한다며 큰 기계를 들고 들어와. 새벽 5시에는 엑스레이 촬영이 있고.”
“그러니 직장에서 얼마나 힘들까?”
아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는 부모 품에서 자라고, 부모는 자식 품에서 늙어가는 거야. 자식 없는 사람만 서럽지.”
규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은 5년 동안 사법고시를 쳤고, 2차에서 매번 떨어졌다. 그러다 취업을 하겠다며 여기저기 서류를 내더니, 서른두 살에 대학 도서관의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아직 사법고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아니면 정규직 취업을 준비하는지, 퇴근 후와 주말에도 상민은 도서관에 늦게까지 머물렀다. 상민이 규식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한자리에 있기를 피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요즘 상민은 퇴근 후면 늘 규식의 곁을 지켰다. 제 엄마를 닮은 선한 눈매로 규식의 몸을 살피며 웃음 띤 얼굴로 규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힘없는 사람들을 도울 거예요”라고 말하던 어린 시절의 총명하고 밝은 상민을 보는 듯했다.
규식은 푸석한 얼굴로 선잠을 자는 상민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이른 아침에 등을 쭉 펴고 병실을 나서는 그 뒷모습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처제와 동서가 병실 문을 나서자, 규식은 피곤해진 몸을 누이며 벽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이 6시를 가리켰다.
4
그 후 두어 달이 흘렀다. 늦더위가 가시나 싶더니, 두어 번 큰 비가 내린 후 이내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의 밤이었다. 규식은 불을 끈 어두운 방에서 사극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리고, 가스 불에 얹어둔 무쇠 팬에서 밤 익는 냄새가 풍겼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일일연속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졌다.
세탁기가 ‘삑’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규식은 팔꿈치로 아내를 쿡쿡 찌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빨래 널어야지. 세탁기 안에서 하룻밤 묵히면 옷에서 냄새나잖아.”
아내는 이마를 찌푸리며 “새벽에 일어나서 할 거야”라고 웅얼거리고는 다시 잠에 빠졌다. 규식은 역정을 내며 마루로 나가 젖은 옷가지를 한 아름 꺼내 건조대에 널었다.
“목 때가 안 지워졌잖아. 뜨거운 비눗물에 담갔다가 솔로 비볐어야지. 저 설거지거리는 뭐야. 아,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그리고 규식은 팬 뚜껑을 열어 젓가락으로 밤알을 이리저리 뒤집고는 가스 불을 껐다. 상민은 11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아버지는 군밤을 까서 아들 앞에 놓으며, 하루의 일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주로 듣는 쪽인 상민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내년에는 정규직으로 승진하겠냐?”
상민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귤껍질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저도 2년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요. 정규직은 따로 모집한다네요. 문헌정보학이나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만…….”
“그럼 다른 곳은 알아보고 있냐?”
규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그런데 나이가 많다고……. 그렇지 않아도 의논을 드리려 했는데요. 도서관 비정규직은 한곳에서 2년 이상 일할 수 없도록 정해졌대요. 이달 말에는 지금 다니는 곳을 나와야 해요. 30대 중반이 넘으면 도서관 비정규직으로도 들어가기 힘들다는데……. 제가 지금 서른넷이라…….”
“그래서?”
규식이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상민을 다그쳤다. 상민이 무심결에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일단 다른 도서관도 알아보고……. 계속…….”
“뭐? 또 2년 동안 그 알량한 돈을 받으며 일하겠다고? 그 뒤엔 또 실업자가 되고? 도대체 밥이나 먹고 살겠냐! 결혼은 언제 할래? 참, 네 엄마는 너 장가갈 때 전셋집이라도 마련해 준다고 저런 팔로 청소를 하러 다니는데. 한심하다, 한심해!”
아내가 부신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흉포한 바람이 황야의 이리 같은 음산한 소리를 내며 베란다 창을 흔들었다.
“저, 결혼 안합니다. 그러니 엄마도 이제 청소하러 다니지 마세요.”
상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내복에 솜 조끼를 걸친 아내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앉았다.
“무슨 일이야?”
규식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식탁 위에는 검게 그을린 밤껍질, 식어서 딱딱해진 밤알, 귤껍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글 · 연진희
글쓴이
번역가. 1972년 울산 출생.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과정 이수. ‘검은 말’,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 단편집’ 등 다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