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년] (13) 한인 선교사들의 ‘건강한 선교’ 모델
입력 2011-12-01 18:09
‘중국 선교의 열매는 중국의 이름으로’ 조선교회의 겸손
한국교회의 산둥(山東)성 선교는 처음부터 중국인 교회를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1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을 보면 우리의 교회를 중국에 세우지 않겠다는 입장이 나와 있다. 한인 선교사들을 중국 노회에 소속하도록 한 것만 봐도 모든 선교 열매를 현지 교회에 돌리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산둥선교 시찰위원으로 선교현장을 방문했던 루터 올리버 매커첸(馬路德)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1922년 신학지남 ‘조선예수교장로교회 중국선교사업시찰사항’). 취재팀 또한 17일간 선교현장을 돌아보면서 한인 선교사들이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사역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과거 한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했던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선교사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털어놓곤 했다.
한인 선교사들, 건강한 선교 모델 제시하려 애썼다
산둥선교를 통해 36개의 교회가 세워졌다(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록). 그 어떤 교회도 한국교회의 이름이나 한국 지명을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 라이양(萊陽)에서 복음당(전도처)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다. 그러나 성과로 이어지는 건 용이치 않았다. 반면 개척 초기 각종 난제를 극복하고 선교지역을 확대시킨 것은 일제강점기에 복음만 들고 찾아온 조선의 선교사들이었다. 1915년 김영훈 선교사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총회 보고에 따르면 초기 한인 선교사들은 라이양 사방 30리를 선교지로 할당받았다.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도국장은 제6회 총회에서 “산둥 선교지역이 동서가 60리, 남북이 60리, 촌이 120여 처로 인구가 많고 곳곳에서 우리 선교사들을 환영한다”고 보고했다.
1918년 가을 라이양 난춘(南村) 스수이터우(石水頭)에 복음당을 세운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는 선교지역 확장을 희망했다. 이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중국 노회에 요청, 1919년 라이양 일대와 핑두(平度), 지모(卽墨)현 일부까지 선교구역으로 확장시켰다. 김교철 인천기독교역사연구소장에 의하면 라이양 서문 내에서 시작된 라이양 교회는 1918년 1월 라이양 남문 밖으로 옮긴 뒤 라이양성(萊陽城)교회라는 이름으로 보고됐고, 1919년부터는 난관(南關)교회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996년 ‘중국 산둥성 라이양 난관교회 역사 연구’). 난관교회는 1918∼1919년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선교사가 연합해 사역한 교회로 1920년 새 예배당을 신축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매입한 땅에 장(長)이 50척(15.15m), 광(廣)이 20척(6.06m), 고(高)가 10척(3.03m) 되는 예배당으로 건축됐다. 라이양성 남정문의 사통오달한 곳에 세워진 난관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외에서 최초로 건축한 예배당으로 총건축비 750원(圓)이 소요됐다. 건축비용은 난관교회 주일연보와 특별연보를 합한 300원과 불신자 야오피더(姚丕德)씨가 기부한 돈 250원, 조선교회의 보조금 200원 등으로 충당했다. 중국인들이 새 예배당 건축비의 73%를 감당한 것이다. 방효원 선교사는 1917년부터 1935년까지 안식년을 제외하곤 대부분 시간을 라이양에 거주하며 난관교회와 주변 지방교회를 돌봤다. 방효원 선교사가 난관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상당히 깊이 관여한 것을 취재팀이 난관교회 출신을 만난 뒤 확인할 수 있었다.
방효원 선교사는 준비된 사역자였다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추방된 선교사 방지일 목사의 선친인 방효원 선교사는 엄격한 유교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방만준은 방씨 집안의 장손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김선준씨와 결혼한 뒤 1886년 장남 효원을, 1889년 장녀 승화를 얻었다. 이어 차남 효형, 삼남 효정, 사남 효천, 오남 효순을 얻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건 기적과도 같다. 방지일 목사에 따르면 방만준은 양교(洋敎)로 알려진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철산읍 기독교인 장관선(훗날 목사가 됨)을 찾아갔다.
“83년 전 1898년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불과 10년 남짓한 때인데 나의 조부 방만준께서는 양교를 알아보신다고 친히 믿는 장관선씨를 찾아가서 말씀을 듣고 곧 믿기로 작정하니 방씨 문중에선 대소동이 났다. 더욱 조부께서 장손이라 그 핍박은 말할 수 없었다.”(1986년 방지일 ‘복음역사 반백년’)
방만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그날부터 20여리나 떨어져 있는 철산읍교회를 출석했다. 삼일기도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밤 집회를 갔다 오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낮 예배 때는 옷을 찢기며 수수밭으로 도망친 일화도 있다. 결국 그는 방씨촌에서 추방을 당했다. 당시 십여 살이던 소년 효원은 신앙 때문에 부친이 핍박을 당하자 격분하고 자신도 믿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방만준씨 가정은 30여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
“한 30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우거해 본댔자 누가 맞아줄 리가 만무했던 바이라 그 처참했던 삶을 다 짐작도 못할 것이라.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과 실로 같았다. 남의 동리에 와서 살기는 해야겠으니 땅을 얻어서 소작이라도 해야 하겠는데 ‘예수쟁이’라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고. 내 가친이 어릴 때 안 해본 일이 없다고도 들었다.”(1987년 방지일 ‘여호와 닛시-방지일 목사 안수 50주년 기념회고록’)
어떤 핍박도 방만준의 마음을 좌절시킬 수는 없었다. 자갈밭을 빌려 옥토로 만들자 이웃 주민들은 “‘방 예수’의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탄사를 쏟아냈다. 또 오히려 그를 해하려던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교회를 건축하고 학교까지 세워 방만준을 교장으로 세우기까지 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부친의 신앙과 근면, 모친의 사랑과 근면에 영향을 받았다. 부친이 평북 기독교 의 중심지가 된 선천(宣川)으로 자녀교육을 위해 이주하면서 그는 20대 초반 신학문의 전당인 선천 신성학교에 진학했다. 10대 때 결혼했던 그는 만학도로서 신교육을 받는 한편 양전백 목사, 휘트모어 선교사 등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는 1906년 설립된 신성학교의 첫 졸업생 9명 중 한명이 됐다. 방효원은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 졸업생, 신성학교 동창 김상현 원성덕은 1926년 평양신학교 제19회 졸업생이 됐다.
신학생 시절 평북 지방 조사(助事)로 활동하던 방효원은 1913년 2월 영동(嶺東)교회 장로 안수를 받았다. 1905년 설립된 영동교회에서 홍승한도 1909년 장로 장립을 받은 바 있다. 방효원은 1912년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총대 자격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총대로 총회에 참석한 것은 1913년 제2회 총회로 장로총대 신분이었다. 평북노회에서 방효원과 함께 장로가 된 김영훈은 1913년 6월 신학교를 졸업한 뒤 8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9월 총회 산둥 선교사로 파송됐다. 방효원이 목사가 된 것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8월 25일이었다. 이후 영동교회, 영천교회 등에서 사역하던 그는 초기 산둥 선교사가 철수한 상태에서 1917년 8월 총회 전도국에 의해 라이양으로 임시 파송돼 활동했다. 이어 매부 홍승한 목사가 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제6회 총회에서 선교사로 정식 파송됐다. 방효원 목사는 1917년 9월 3일 제6회 총회 저녁 ‘강설회(講說會)’ 시간에 로마서 11장 25절부터 36절까지 낭독하고 산둥 선교지 형편을 보고했다. 그는 봉독한 말씀대로 선교의 부르심에 응답, 기꺼이 선교사로 나갔다.
라이양=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