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의 野口] And 100번째 ‘그리고 다른 섹션은 없었다’

입력 2011-12-01 17:54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소설에 자극받은 적이 있다. 추리문학의 본때를 보여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다. 외딴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한 명씩 죽어나가고 막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전혜린의 에세이집도 떠오른다. 당시의 한국에서는 너무 멀었던 서구 생활의 편린들이 감각적이었다.

그리고 And 섹션이 100호를 맞이했다. 발랑 까르륵 축하드리는 의미로 ‘And’라는 섹션 이름에 주목해 보았다. 누군지 참 잘 지었다. ‘그리고’라는 말. 참 괜찮은 접속사 아닌가. 뭔가 쭉 계속되는 진행형이자 평등하게 앞뒤를 연결하기도 하고 양쪽을 더불어 합일하는 마력적인 단어라고 본다. 그리고 뭔가 좋은 걸 더하는 역할로 쓰일 때도 퍽 매혹적이다. 월급에 보너스를 따로 받는 느낌이랄까. 그처럼 신문 본연의 기능인 뉴스가 있고, 거기에 And 섹션이 더해질 때 멋질 거다. 이 섹션의 정체성을 유난히 잘 대변하는 제목 되겠다.

야구에서도 ‘그리고’가 무서운 용법으로 쓰일 때가 있다. 어떤 선발 투수가 던진다. 어떤 릴리프 투수가 던진다. 그리고 오승환이 던진다. 이럴 때의 ‘그리고’는 참 무서운 단어일 것이다. 나는 이런 느낌이 And 섹션의 존재감이면 좋겠다.

100호 특집에 대한 감상을 써보려고 지난 And 섹션 콘텐츠들의 뒤태를 쭉 감상해보니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며 새치름한 간식을 맛본 느낌이 들었다. 율곡 십만양병론의 진위에 대한 맛깔 난 기사나 스타일링 컨설턴트 인터뷰 등이 입맛에 맞았고 ‘그리고’라는 마력적인 단어도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박상 어쩌고 하는 녀석의 어정쩡한 칼럼만 빼고.

그런데 나는 이 페이지가 ‘그리고’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그러나’라는 접속사에도 설핏 주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신문사들이 주말 섹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국민일보의 And도 있다보다는 ‘그러나’ And가 있다는 깜짝 확장을 하면 어떨까 하는 거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말은 핵심적인 뼈를 드러낼 때가 많다. 세상은 이러저러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어떠하게 바뀌기를 꿈꾼다 같은 어법으로 ‘그리고’의 아름다운 역할도 유지하면서 ‘그러나’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지면이면 하는 것이다. 필자들이 많고 기사의 접근 범위도 다양하지만, 읽을거리로서의 다채롭고 편안한 느낌보다는 그러나 이러면 안 된다거나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한다 식의 근성이 더해지면 더욱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섹션 And가 쭉쭉 발전해 ‘그리고 다른 주말 섹션은 없었다’ 같은 무서운 삼진 포스나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정도의 감각을 과시해 나가게 되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