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양부모에 버림받아 귀국한 서마태 고시원 전전·영어강사 중도 하차… 한국 정착, 제겐 꿈이죠
입력 2011-12-01 17:57
하프코리안, 2011년 겨울
100번째이야기 And에 소개됐던 두 사람, 그 후
잘 살겠거니 했다. 하긴 도와주겠다는 분들이 그렇게 많았으니까.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2번 출구 앞.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오후 12시50분. 약속시간이 20분 지났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는데. 그래, 원래 좀 유명해지면 절박함은 잊혀진다.
그의 사연이 국민일보에 소개된 이후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의원이 멘토를 자청(6월 3일자 22면)하는 등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다가 무국적자가 된 서마태(미국명 매튜 쉐러·33)씨. 아이를 갖지 못하던 양부모가 출산에 성공한 후 가족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낀 서씨는 결국에는 미국 국적도 얻지 못한 채 열여섯 살부터 현지 보육원 신세를 졌다. 법적 성인 연령인 열여덟 살에 홀로서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자취생활을 해왔다.
그를 처음 인터뷰한 지 꼭 여섯 달 만이었다. 기어코 오후 1시를 넘겨 나타난 서씨는 그러나 기억 속 모습보다 초라해져 있었다. 서울 신촌에서 이태원으로 고시원을 전전하다, 최근 네덜란드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이태원 입양인 친구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모국(母國)으로부터 허락받은 한국 국적은 그에겐 녹록지 않은 적응기간을 요구했다.
“국방부에서도 저를 많이 찾았대요. 그동안 국방의무자 가운데 ‘실종자(Missing Person)’로 처리돼 있었다나요. 입양 서류를 뒤져 가까스로 한국 국적을 되찾아 귀국했더니 지난 9월 출국금지를 통보받았어요. 군복무를 해야 나갈 수 있다는 거죠. 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었어요. 솔직히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두렵긴 했어요. 근데 제 호적에 고아(孤兒)로 등재돼 있는 걸 확인한 국방부가 지난주 군복무 의무를 면제해줬습니다.”
떠들썩했던 관심은 이내 잦아들었지만 따뜻한 이웃은 늘 주변에 있었다. 서씨는 지난 5월 이태원 한 주점에서의 일을 들려줬다.
“친구를 만나 맥주 한잔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미국인이 악수를 청하더니 대뜸 ‘신문에 나온 분 맞죠(You’re the guy in the paper, aren’t you?)’라고 물어오더라고요. 크리스(39)라는 이 백인은 ‘7월에 일본으로 떠나는데 내가 있는 학교 영어강사 자리에 너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학교에서 영어 보충수업 강사로 한 달 조금 넘게 일했어요. 학교에선 정식교사로 채용하고 싶어했는데 대학졸업장이 없어 교육청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전 열여덟 살부터 지금까지 일만 했어요. 미국선 그 정도면 학사 학위에 준하는 경력으로 인정해주는데….”
영어강사 일을 접은 뒤 서울 잠실본동의 입양인 지원단체 ‘둥지’에서 새 일거리를 찾았다. 아직은 고국을 찾는 입양인의 한국 일정을 돕는 게 전부이지만, 해외로 입양됐다가 영구 귀국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발효된 아동시민권법에 따라 미국으로 입양된 아기는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됐습니다. 근데 그 이전 입양된 이들은 양부모가 귀화 절차를 밟아주지 않으면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어요. 저처럼 한국의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미국 국적도 없는 무국적자가 또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입법청원을 시작했어요. 현재 1300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동참해주고 있어 조만간 미 의회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청원이 받아들여져 2000년 이전 입양자들이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게 되더라도 자신은 미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제가 입양을 간절히 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미국인들이 ‘수입’했다가 더 이상 귀엽지 않다고 해서 버려진 아이들이 국적 문제로 고초를 겪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저는 곧 미국 영주권을 잃게 됩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미국 정부를 향한 제 싸움은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처지의 입양인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는 어머니의 소재를 찾았다는 것을 끝까지 숨기고 싶어했다.
“사실 지난주 어머니 고향에 계시는 외삼촌께 다시 연락을 드려봤어요. 일흔여섯이나 되셨는데…. 근데 어머닌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저도 그런 어머니 마음을 존중해 주고 싶지만…. 돌아가시면 기회가 없잖아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늘 입고 다니는 코트에 긴 우산을 짚고 지하철역사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집에 가야죠.” 이태원. 한국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이지 못한, 그를 닮았다.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하프 코리안인 그가 이 땅에서 긴장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