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내 이름은 한국인 방대한 날마다 행복합니다

입력 2011-12-01 17:56


하프코리안, 2011년 겨울

100번째이야기 And에 소개됐던 두 사람, 그 후


그로부터 13개월이 흘렀다. 칸 모하매드 아사드 자만(37)은 기자를 만나자 대뜸 운전면허증을 신분증 대신 내밀었다. 이름 방대한. 지난 4월 귀화신청이 받아들여졌을 때 직접 지은 한글 이름이다. 방글라데시 출신이니 성은 방씨로, 스물두 살 때 대한민국에 건너와 여태 살았으니 이름은 대한으로 지었다. 지난해 10월 22일자 국민일보 주말섹션 And에 소개된 이후 칸, 아니 방대한씨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를 지난달 29일 서울 홍은1동 포방터 시장에서 만났다.

칸(아직은 방대한보다 칸으로 불린다)은 케이블채널 방송 녹화 분을 찍고 있었다. “칸이야, 칸.” 시장통을 뚫고 들려오는 어느 노파의 목소리.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칸이 이날 찍는 프로그램은 티브로드 방송의 ‘가자 시장 속으로’다. 상인의 장사를 도와주고 일당으로 받은 돈을 전액 불우이웃을 위해 내놓는 프로그램이다.

“(리포터를 가리키며) 여기는 국산, (자신을 가리키며) 여기는 수입산. 저는 수입산이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칸한테 자꾸 돼지를 주시는데요, 방글라데시에서 온 칸은 돼지고기 안 먹습니다.”

시장 정육점에서 칸이 애드리브를 쏟아내자 리포터 이희은씨가 “칸씨 오늘따라 말이 너무 많습니다”며 장난스레 견제구를 날린다. 칸이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지도 벌써 8개월째다.

칸이 고정 코너까지 맡게 된 데는 지난 1월 출연한 KBS 2TV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2일’ 덕이 컸다. 당시 캄보디아, 네팔, 미얀마, 파키스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외국인 노동자 특집’ 편에 나왔던 칸은 시종 튀는 말솜씨로 눈길을 끌었다. 외국인 노동자 특집 편은 시청률 1위를 자랑하던 ‘1박2일’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칸은 그 뒤 ‘체험 삶의 현장’ ‘1대 100’ ‘여유만만’ 등 각종 프로그램에 섭외됐다. 최근엔 종합편성채널 두 곳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 이쯤 되면

‘방송인 칸’이다.

그는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9년 KBS 1TV 전국노래자랑 충북 음성군 편에서 조항조의 ‘만약에’를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후 지역에선 ‘가수’로 통한다. 읍내에서 잔치라도 열리면 초청가수 1순위가 칸일 정도. 종종 다른 지방에서도 그를 찾는다. 그 기세를 타고 지난 8월엔 서바이벌 가수 선발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3’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4차 예선인 ‘슈퍼위크’에서 고배를 마셨다. 슈퍼위크는 지원자 197만명 가운데 지역예선을 통과한 100여명만이 생방송 출연권을 놓고 경쟁을 펼친 마지막 예선이었다.

“선곡이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 것만 해도 만족해요. 확실한 건 칸은 대한민국 100명 안에 들었습니다.”

칸은 배우로서 일본에도 다녀왔다. 그가 지난해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방가 방가’가 최근 일본에서 개봉돼 시사회에 초청받은 것. 칸은 영화 속 외국인 노동자 4명 중 1명의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도 자신을 일본까지 초청해줬다며 기뻐했다. 그간 영화 출연 제의를 많이 받았다. 깡패, 납치범 등 자신이 원치 않는 이미지라 거절했지만 역할만 맞으면 언제든 응할 생각이란다. 1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삶이다.

-공장일 그만 뒀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일보 인터뷰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공장 생활하고 있습니다. 칸이 연예인 됐다? 아닙니다. 저는 공장인이고 공장일 하면서 떳떳하게 활동합니다.”

칸은 지금도 음성군 삼성면 동우건설ENG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다. 한 달 꼬박 출근하진 않아도 15∼20일은 공장에서 일한다. 그에게 노동은 생업이다.

-방송하고 각종 행사에도 초청될 정도면 돈 많이 벌지 않았나요.

“돈 많이 못 벌었습니다. 출연료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복하니까 합니다.”

-공장일은 그만두기 힘들겠군요.

“이제는 제 공장이나 마찬가집니다. 사장님을 한 번도 사장님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형입니다. 마을 사람들 다 제 어머니고 아버지입니다. 돈 벌 목적으로 왔지만 이제는 정 들어 못 그만둡니다. 만약에 음성군 삼성면에 오게 되면 그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가 그분들한테 어떻게 하는 지 봐주세요. 삼성면에서 칸 모르면 간첩입니다. 진짜 행복합니다.”

그는 ‘행복’이란 단어를 인터뷰 도중 수십 차례 썼다. 그에겐 가장 중요한 가치가 행복이다.

-행복이란?

“좋은 마음입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그건 좋은 일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 갖고 있으면 좋은 일 생기게 돼 있어요. 안 좋은 마음 갖고 있으면 나쁜 일 많이 생겨요.”

-한국에 온 걸 후회한 적 있나요.

“딱 한 번요.”

그는 재작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어머니도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국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 갈 거예요. 돈 더 많이 벌어서 어머니 좋은 병원에서 치료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더 사랑해야겠습니다. 왜? 이 나라에 와서 제가 많은 걸 느꼈고 배웠습니다. 열심히 하니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구나, 이 나라 와서 느꼈습니다.”

오후 6시, 인터뷰를 마칠 무렵 칸은 또 운전면허증을 꺼내 보여줬다. “필기시험 아홉 번 만에 딴 면허증입니다.” 그는 뿌듯해했다. 그때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칸의 팬이라며 호떡 두 개를 내밀었다. 점심을 거른 칸은 호떡을 받아들고는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와 함께 시장을 빠져나왔다. 양손엔 짐이 한 가득이었다. 다음 날 경남 창원 지역 행사에서 노래할 때 입을 양복과, 이틀간 찜질방에서 잘 때 필요한 소지품이 들어 있는 가방이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 3호선 홍제역까지 함께 이동하는 동안에도 칸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다.

“칸이구나.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역 개찰구에서 마주친 한 할아버지는 칸을 아예 부둥켜안았다. 할아버지는 칸에게 ‘영어로’ 산과 바다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말했다. 기자는 칸이 한국말을 잘한다고 답했다. 칸은 할아버지와 한참을 우리말로 대화를 나눴다.

연락처를 알려 달라는 할아버지에게 칸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칸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명함에도 칸의 한국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방대한이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