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실버, 무지개 아이들과 희망 하모니… 엔젤크레용 합창단 만든 다음누리 이영성 회장

입력 2011-11-30 17:59


지난 23일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 크라츠테크노빌딩 207호. 오후 2시를 좀 넘기자 아이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좀 지나자 떼를 지어 몰려든다. 이들은 사무실 직원들에게 반갑게 인사하고는 자기들끼리 수다를 늘어놓는다. 몇몇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과자와 사탕 등이 담긴 간식 접시로 달려가기에 바쁘다.

조용한 사무실이 갑자기 북새통으로 변한다. 거의 3시가 되자 누군가가 짝짝 손뼉을 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아 인원수를 점검한다. 정확히 27명이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씩 진정된다. 지휘자의 통솔에 따라 마침내 합창 연습이 시작된다. 귀에 익은 동요와 낯선 노래들이 몇 곡 이어진다. 간간이 박자를 못 맞춰 지휘자의 지적을 받는 아이도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합창이다.

다문화가정 아이들로 구성된 ‘엔젤크레용 합창단’은 이렇게 수요일마다 기독 NGO ‘다음누리’ 사무실에 모여 연습을 한다. 연습도 연습이지만 이들로선 한 자리에서 서로 동질감을 나누면서 노는 게 더 즐겁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약간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아이도 있다. 역시 태국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출신 엄마나 아빠를 가진 아이들이 들어 있다.

여기저기 낮은 자들 섬겨요

다음누리 이영성(71) 회장은 요즘 이 합창단으로 인해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어려운 형편의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합창단이 되레 곳곳에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국의 수많은 행사에 초청됐고, KBS1 TV ‘러브 인 아시아’에 출연하기도 했다.

“여러 색깔의 크레용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다른 피부색의 아이들이 조화를 이뤄 당당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네요. 저마다 즐거워하면서 꿈을 키워가고 외부에 선한 영향까지 미치고 있으니까요.”

이 회장은 다음누리를 이끌면서 요즘 부쩍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게 또 하나 있다. 경기도 광주의 ‘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 운영이다. 언제부턴가 외국인근로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그 이전에 신앙인으로서 낮은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는 훌륭한 사역이라고 여겼다.

현재 센터에서는 취업현장 문제 상담부터 무료 진료와 이·미용 봉사, 컴퓨터교실과 쉼터 운영 등이 이뤄지고 있다. 주일이면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뒤 자국의 요리를 만들어 먹도록 돕는다. 때로는 한국문화 체험 행사를 갖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문 의사들의 진료는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 인근의 한신교회, 구미교회, 가나안교회, 남서울은혜교회는 매주 돌아가며 의료진을 보내주고 있다.

“이들이 언젠가 저마다의 고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져야 합니다. 대수롭잖게 여길 수 있지만 한국의 위상과 발전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보다도 한국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돌아가도록 하고 싶습니다.”

노인이라고요?

이 회장은 매일 아침 사무실 출근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출근 후엔 다음누리 사역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직원들과 회의를 한 다음 현장으로 나간다. 다음누리가 진행하는 일은 수없이 많다. 다문화가정 어린이와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일 외에도 지역아동센터 운영, 독거노인들에게 반찬 배달하기, 안 쓰는 물건 모아 어려운 곳에 전달하기 등이다.

거기다 ‘효의 사회화’ 운동은 이 회장이 초지일관 심혈을 기울이는 사역이다. 어려운 노인들을 돌보기 위한 효실천봉사단과 어려운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천사의밥상 운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뿐인가. 해외 사역도 활발하다. 북한을 비롯해 태국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탄자니아 스리랑카 등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1940년 12월 8일생. 71년 인생을 꽉 채웠다. 누가 봐도 일선에서 은퇴해 쉴 나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 모든 일을 직접 챙길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 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힘들어하기는커녕 되레 즐기고 있다. 그를 만나면서 ‘노익장’이라는 말을 수없이 떠올렸다. 그날도 합창단 연습이 끝난 뒤 아이 엄마들과 저녁 늦게까지 간담회를 가졌다.

“지금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는 찬송가 구절도 있잖아요? 이 땅에 있는 동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세상에 다 쏟아내고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일까, 이 회장의 노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노령화에 진입한 우리 사회에서 노인 문제 해결 없이는 복지를 논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추진해온 효의 사회화 운동도 그런 차원에서다. 그는 노인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80세 모세와 85세 갈렙이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며 다음누리 사무실 직원 6명 가운데 4명이 노인이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노인들에게는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과 경륜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든 일머리를 알고 잡아나가는 데에선 노인들이 뛰어납니다. 한데 능력 가진 많은 노인들이 매일 시간 죽이는 법만 생각하고 있으니 안타깝죠. 효가 무엇입니까. 노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 회장의 관록이 여간 아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한 뒤 16년간 중등교사로 지내다 성남시의원과 경기도의원(2선) 및 부의장, 전국여성광역의원협의회 부위원장, 경기도 여성정책국장 등을 지냈다. 이 회장은 자신의 이런 이력 또한 현재의 사역을 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20여년 동안 꾸준히 펼쳐온 그의 ‘섬김 사역’을 통해 쌓은 노하우는 기독교계 안팎에서 인정받고 있다.

우리 함께 천사가 됩시다

성남 성민교회 권사이기도 한 이 회장의 섬김 사역은 1990년대 초반 경기도의 결손가정 어린이 돕기로 시작됐다. 이 일로 섬김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지역 내 독거노인 돌봄 등으로 점차 외연을 넓혔다. 그러던 중 경기도 성남과 광주의 여성 기독교인들과 의기투합해 ‘섬기는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때 회장을 맡은 이래 계속 단체를 끌어오다 지난 9월 이름을 다음누리로 바꿨다. 다음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는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담고자 해서다.

“아직 다음누리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단체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섬기는사람들의 일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회장은 요즘 필리핀 선교지에서 만나고 온 한 아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 아이에게 천사가 되고 싶다는 기도, 그 아이에게 천사가 나타나도록 해달라는 기도다. 온 몸에 검은 점이 뒤덮인 채 털로 덮여 있는 아이의 불쌍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내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누리의 사역에는 ‘천사’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 있다. 엔젤크레용에서부터 천사를 꿈꾸는 어린이, 천사가 되고 싶은 아이들, 천사우체통, 천사의 밥상, 100만 천사 운동….

어쨌든 이 회장은 70대의 노인이다. 하지만 그의 활동상은 젊은이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요량으로 일종의 유도 질문을 던졌다. “아주 가끔은 아주 조금이라도 힘들 때가 있죠?” 원하는 답을 얻었다. “그럴 때도 있죠. 하지만 하나님이 시키시면 해야죠.”

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