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세종대왕에 열광하는 이유

입력 2011-11-30 21:35


SBS 수목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수요일이나 목요일 저녁 약속을 잡을라치면 “오늘은 좀 볼 게 있어서…”라며 사양하는 이들이 꽤 된다고 한다. ‘귀가시계’라 불렸던 ‘모래시계’만큼은 아니라 해도 ‘뿌리 깊은 나무’에도 귀가를 종용하는 매력이 있는 듯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얘기가 주된 모티브다. 반대하는 사대부들의 음모와 조직적인 저항을 뚫고 뜻을 지켜나가는 세종의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대리 만족을 느낀다. 모두 알고 있는, 뻔한 그의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왜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드라마의 속성상 극적인 요소를 더하다 보니 주인공의 말이나 행동이 더 미화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 요소만으로 열풍의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많은 시청자들이 ‘뿌리 깊은 나무’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드라마 속 시대상이 현재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선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사대부와 백성의 편에 선 왕이 대립한다. 사대부(특권계층)와 백성(서민)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모습과 소통 부재의 문제는 TV 속 조선시대나, 지금의 현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시청자들이 쉽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다. 현실에선 갈등을 해결하는 현명한 지도자를 찾기 힘든데 드라마 속에선 왕이 직접 나서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이 늦은 밤 TV 앞에 앉아있는 것은 현실에서 보고 싶은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탈출구 없이 대립으로만 치닫는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대리 만족일 수도 있다.

세종은 태조 6년(1397)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 충녕대군으로 봉해졌고, 스물한 살 때인 태종 18년(1418년) 조선조 4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한 세종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4군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는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이 모든 업적 중에서도 가장 칭송받아야 할 것은 단연 한글을 만든 것이다. 단 28글자만으로 모든 소리와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든 한글은 쉽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뛰어난 문자다. 한글은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입력·검색을 할 때 속도가 어느 문자보다 빠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 한글보다 더 빨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문자는 이 세상에 없다.

반면 디지털 기기로 의사소통을 할 때 가장 느리고 어려운 문자 중 하나는 한자다. 글자 수가 10만 개가 넘는 데다 컴퓨터용 자전에 들어 있는 글자만 해도 2만7000여 자에 이른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한자로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중국인이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한자를 입력하려면 영문 알파벳 발음으로 입력한 뒤 똑같은 발음의 글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국어를 입력하기 위해 중국어가 아닌 영어의 힘을 빌려야 하고 그나마도 한글에 비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어 역시 같은 단어라 해도 발음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아 원하는 글자를 일일이 선택해서 입력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만약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중국이나 일본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쓰고 있을 것이다. 수백 년 전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으로 만들어진 한글이 디지털 경쟁력이 중요한 화두가 된 오늘날까지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이 되고 있는 셈이다.

정승훈 특집기획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