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막둥이 코미디언 구봉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입력 2011-11-30 17:04


[미션라이프] “웃는 게 습관이 돼서 문제가 될 때도 있어요. 상가집에 가서도 웃으면서 인사해 가끔 가다 말도 듣고 그래요. 집사람도 잘 웃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도 내가 보면 별 것도 아닌데 혼자 낄낄대며 웃어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구봉서(85·예능교회) 장로는 영락없이 막둥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최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난 구 장로는 허리통증과 관절염으로 몸놀림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의 수족 같은 부인이 곁에 있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구 장로는 1960년대 TV방송국 개국과 함께 안방극장에 진출, 비실이 고(故) 배삼룡, 후라이보이 고 곽규석씨와 콤비를 이루며 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구수한 입담과 풍자로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던 구봉서. 현재 그는 방송 활동을 접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기독교 관련 방송에서 간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할 일 없이 앉아있는 사람은 시간이 더디 간다고 하는데 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요. 요일에 맞춰 병원에도 가야하고. 주일엔 교회 가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요. 예배보고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점심 먹고. 애들까지 다 모이니까.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다 가요. 평일에는 가끔 친구들과 점심 먹으러 가든가. 점심 먹자고 전화 오면 우리 집에서 다 모여요. 우리 집 앞에서 차를 타고 나가서 밥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집에 들어오면 3시가 돼. 자로 잰 거 같이 정확해요. 씻고 TV보다 지루하면 책을 많이 봐요. 옛날 보던 책도 다시 보고. 주로 일본책을 봐요. 일본에서 아는 사람이 보내줘요.”

어린 시절 꿈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었다는 그는 지금도 일본문예잡지와 소설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전성기 때는 소재를 찾기 위해 늘 책을 읽어 공부하는 연예인으로도 알려졌다.

“일본강점기 때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국어 책보다 일본어 책이 눈에 익어요. 그래서 일본책을 즐겨 봐요.”

-어릴 때는 성악을 잘 하셨다고 하는데요.

“다섯 살 때부터 방송국에 나갔어요. 노래로. 남산에 일본 어린이방송국이 있었어요. 사춘기 때 피아노를 치려다가 손이 짧아서 아코디언을 했어요. 한때는 음악이 좋아 음악학교에 입학했어요. 막상 해보니 큰 흥미를 갖지 못해 그만두고 현제명 선생한테 성악을 사사했죠. 그때만 해도 목소리가 맑고 고와 본격적으로 테너 음악수업을 받았어요. 일제 때라 학교가 없어져서 오래 못했어요. 대동상고 졸업 후 잠깐 공무원도 했었어요. 아코디언 들고 다니다 악극단 사람 눈에 띄어 인생이 바뀌었어요. 태평양가극단인데 일 좀 해달라고 하는데 아버지한테 야단맞는다고 안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아버지를 찾아와 설득해 3일만 연주하기로 했어요. 그랬는데 점점 연장하던 어느 날 희극 배우 하나가 안와서 대타로 무대에 올랐어요.”

-대타로 오른 무대에서는 연주가 아니라 희극 연기를 하셨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났어요, 손님들이 웃으니까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를 막 했지. 박수가 쏟아졌어요. 윗사람한테 건방지게 애드리브 했다고 야단맞았지만 선배들은 잘했다고 칭찬했어요. 그래서 희극배우가 된 거지요.”

-56년 ‘애정파도’란 영화를 시작으로 400여편의 영화를 찍으셨다고 하던데요.

“그 중에 ‘오부자’가 날 스타덤에 올려놓았어요. 우리나라에 이렇다할 쟁쟁한 사람들만 나왔어요. 출연배우 중 나만 살아있어요. 막내 아들이라고 막둥이라고 했지.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그 영화 찍을 때도 애드리브로 찍었어요. 대본에 빈칸이 있었어요. 주인공을 200편 넘게 했어요. 포스터에 내 이름을 내려고 주인공이 아닌 것도 있었고.”

-당시 영화 제작 상황은 어땠나요.

“열악하지. 지금은 영화 한 번 찍으면 필름을 20만자 30만자 쓰는데 그때는 1만자로 끝내라고 했어요. ‘남자식모’란 영화는 녹음까지 해서 일주일에 끝냈어. 영화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못하고 사람 위주로 찍었지.”

-영화 촬영 중 큰 사고를 당하셨지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어요. 몇 달 동안 병원에 있는데 병원비도 우리가 냈어요. 보상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앉아서 끝까지 찍었어요. 입원실에 와서 방송 녹음도 다해가고. 이후 계속 그 다리만 교통사고가 두 번 났어요. 이 사고 이후 2007년 허리디스크 수술, 2008년 간 질환 발병, 2009년 뇌수술 등 계속 건강이 안좋았어요. 잘 걷지 못해 미끄러지지 말라고 목욕탕에 깔아놓은 카펫에 걸려 넘어져 생사를 오락가락한 적도 있어요.”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한데 어떠셨냐고 물었다. “고쳐달라고만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이것 좀 고쳐주십시오.” 결국 이 사고로 인해 고질적인 관절염도 앓고 있다.

-출연한 영화 중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영화가 있습니까.

“그런 게 뭐 있나. 나는 전부 창피해서.”

이때 아내가 다과를 내오면서 말을 거든다. “1969년 정극 영화인 ‘수학여행’이 제일 좋아요.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유현목 감독이 만드셨어요.”

-작품 선택 기준이 있으셨나요.

“봐서 재미있을 거 같은 거. 재미없는 거 와도 옆에서 부추기면 그냥 했어요. 근데 하고 나면 후회해요. 잘 된 거든 안 된 거든 그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도 못 봤어. 2시간 이상 보고 있을 시간도 없고 보고 있는데 나 있는지 모르고 욕할까봐. ‘저거 왜 저래’ 옆에서 누가 그럴까봐 구경을 못했어요.”

-68년부터 무려 15년 이상을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셨어요.

“MBC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코미디 프로가 생겼는데 코미디를 통해 스토리가 있는 연기를 했어요. 당시에는 바보연기가 인기였는데 먼저 돌아가신 가수 김정구씨가 나보고 ‘원래 코미디하는 사람은 제 얼굴 가지고 웃겨야지. 뭐 얼굴에다 그리고 그러면 네 재주로 웃기는 거냐? 그려놓은 걸로 웃기는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바르고 했어요. 나는 그냥 내 얼굴로 웃기겠다는 지론이 있었지. 그래서 그랬는지 영화도 웃기지 않는 영화 주연을 두 편 했어요. 심심하게 해도 잘 웃어줬으니까 뭐.”

-박정희 정권 때 시대풍자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코미디 없애자고 그랬어. 문화공보부 장관이 없애자고. 그래서 대통령한테 직접 찾아갔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냐고. ‘누가 저질스럽게 해서 없앤다는데. 택시가 사람치면 다 없앨거요’하니까 ‘누가 그래요 없애자고.’ ‘문공부장관이 그러던데요’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살았어요. 전에 베트남 위문공연 가서 박 대통령하고 알게 돼 친했어요.”

-85년 결국 ‘웃으면 복이 와요’가 폐지됐어요.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사회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지됐어요. 이제 한 시대가 지났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한창일 때는 휩쓸었었는데. 낙엽이 굴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대요. 진짜.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사는 게 다 그렇지.”

-라디오에서는 이름을 걸고 진행도 하셨어요.

“6·25 전쟁 중에 KBS에서 양석천씨와 ‘홀쭉이와 길쭉이’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정말 많은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어요. ‘노래 실은 희망열차’ ‘안녕하세요 막둥이 구봉서입니다’ ‘노래하는 유람선’ 등 70~80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 같아요. 내가 방송을 선호한 것은 영화나 텔레비전보다 한결 여유가 있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에요.”

-방송에서 시대 풍자를 하셨는데 시대적 분위기가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안녕하세요 구봉서입니다’란 타이틀로 동아방송 동양방송 KBS 다 했어요. 조심스럽게 시대 풍자를 했어요. 끄트머리에 ‘이거 되겠습니까 안됩니다’를 붙였어요. 그게 공전의 히트를 했어요. 정치 얘기는 방송에서 못했어요. 국가정책 가운데 조금 납득이 안가는 걸 풍자했지. 우리가 ‘12부 장관’이란 쇼를 했는데 장관들 어전회의. 정부시책에 반하는 발언을 하면 내가 있다가 ‘그렇지 그러나 그런거 하면 안되지’하면 그냥 넘어갔어요. 할말은 하면서 넘어갔어요.”

-콤비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는데 같이 일하면서 호흡이 제일 잘 맞았던 분은.

“사람들은 배삼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곽규석이랑 제일 잘 맞았지. 네 살 어린가. 재밌게 해서 좋았어요. 세상 먼저 떠난 게 정말 아쉬워요. 그 이상 아쉬운 게 없어요. 걔 생각을 자주 해요. 우리 정월 초하룻날 뭐하자 이러면 틀림없어. 그 날 그 시간에. 약속을 잘 지켜요. 다른 사람은 약속을 잘 안지키니까 더 좋았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란 라면 CF가 히트 치면서 라면 이미지, 판매고 전부 올려놨잖아요. 그래서 다시 할 뻔했어요. 미국에만 안 갔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 후를 다시 찍으려고 했거든. 한 번 더 하자고 들어왔었어요.”

-인기의 정점에서 독실한 ‘예수쟁이’로 변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하용조 목사님이 계속 전도하시고 부인이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니까 안나갈 수가 없었어요.”

사실 구 장로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불혹의 나이인 40을 넘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는 누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도마처럼 하나님을 보여달라며 의심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자장가였고 여성도들의 기도는 남자보다 배가 더 길어 싫었다. 이제 끝나려나 싶으면 다시 “원하옵건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거들었다.

“결혼할 때는 시어머님이 불교를 믿으셨어요. 4남2녀의 맏이라 맏며느리로 일 많이 했어요. 동생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제게 시어머님은 결혼 전에는 종교는 자유라고 하셨어요. 결혼하니까 시어머님이 한 집에서 두 종교 가질 수 없다고 못나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초하룻날 보름은 시어머님 따라 절에 가야 됐어요. 절에 가서 부처님 보면서 ‘주님 아시죠’하고 절했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나도 예수 믿겠다고. 그리고 구씨네 집 대대로 불교인데 동생들 전부 장로, 권사 됐어요. 말 한마디도 안했는데.”

-전도는 어떻게 하셨어요.

“아이를 낳으면 밖에 나갈 자유를 주셨어요. 그래서 조용히 영락교회를 다녔지요. 새벽에는 안방에서 ‘관세음보살’ 하시고 건넌방에서 나는 ‘주여’ 기도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겼죠. 승리했어요. 시어머님도 예수 믿으시고 봉사 많이 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안방에서 연예인 교회가 시작됐다는 건 뭔가요.

“하용조 목사님이 마포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님이었을 때 ‘웃으면 복이 와요’ 연출 김경태 장로가 그 교회 장로였어요. 부인이 마포교회 전도사인데 하루는 오셔서 성경공부 안하겠냐고 했어요. 그때는 시어머님도 교회에 나가시고 믿을 때라 주일에만 교회를 다녀서 하겠다고 말하고 몇 사람이 모였어요. 제가 직접 지은 집이었는데 때마침 오일 파동으로 기름값이 너무 비싸 성경공부를 하는 안방만 난방을 했어요. 남편은 그때 다리를 다쳐 방 한쪽에 누워 잔다고 하더니 설교 말씀까지 다 듣기를 여러 번 했어요. 다리가 쉽게 낫지 않자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도중에 잠이 들었어요.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깨어나더니 사흘 뒤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기적이지요. 그러더니 곽규석씨 부부, 서수남 윤복희 정훈희 김자옥 고은아씨 등과 성경공부를 했어요. 74년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아마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그랬겠지요.”

입소문이 나면서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사람이 40명을 넘고 안방에 다 앉을 수 없어 사무실을 얻었다. 76년 3월 7일 ‘연예인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고 지금은 이름을 바꾼 서울 평창동 예능교회를 섬기고 있다.

-영접 후 품었던 비전은 무엇입니까.

“봉사예요. 간증집회하면서 단에서 돌아가시겠다고 서원했어요. 간증 집회 다니며 받은 사례금을 모아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학교를 지었어요. 고은아 권사가 우간다에 갔더니 ‘구봉서 학교’가 있어서 놀랐대요. 아이들이 ‘제가 학교 선생님이 됐어요’라는 등 테이프도 보내주고. 아프리카에 못 가본 게 아쉬워요. 신망애보육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이 넘어요. 유니세프, 월드비전도 돕고 있어요.”

-영화, 라디오, TV, 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자녀 교육은 전혀 신경 못쓰셨겠습니다.

“한달에 닷새밖에 집에서 안 잤어. 노상 밖에 있었지. 애들 교육은 저 사람이 다 했어요.”

부인은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잘못 될까봐 어릴 때부터 유치원도 교회 유치원에 보내서 잘못 될 수가 없었지. 예수전도단에 다 가서 훈련받고. 로스 목사 계실 때. 명동 YWCA 집회에도 많이 나가고 강원도 예수원에도 갔어요.”

-요즘 개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자기들만 아는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예를 들어 무슨 사건이 났다 할 때는 중간에 딱 잘라서 하니까 이해가 안돼. 말장난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내용이고 다 비슷비슷해.”

-젊은이나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매사에 최선을 다해라. 후배들에게는 웃기지 않는 대본으로 웃기려고 애쓰지 말라고 해요. 그냥 넘어가고 그 다음 코너에서 웃겨라. 지금은 제 말이 안통할 거예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길어서 여기서 안 웃기면 다음에 웃기면 됐는데 지금은 단발성이라 노상 웃겨야지. 나이든 사람을 배려하는 코미디도 만들어줬으면 해.”

-후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라시나요.

“코미디 프로나 TV 볼 때는 옛날에 여기 아무개가 있을 때에는 참 좋았는데, 그 때 내가 많이 웃었는데 이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