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 재건 콘서트 구자형

입력 2011-11-30 17:51


구자형(57)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회의(懷疑)도 많이 했어요. 과연 바꿀 수 있을까. 제가 15살 때 음악을 시작했으니까,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까지 42년이 걸린 거죠.”

-인류 역사에 무수한 음악이 쏟아졌지만 그것 때문에 세상이 뒤집힌 적은 없지 않습니까.

“지미 핸드릭스라는 대스타가 1969년 미국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하죠. 들으면 알 수 있게끔 일렉트릭 기타로 월남전을 상상케 하는 폭탄소리를 표현합니다. 완전 굉음이죠. 그 사람이 나중에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 월남에서 정치가들이 쇼를 하는데 나는 우드스탁에서 내 쇼를 했다.’ 그때부터 음악이 사랑과 평화를 향해서 전진해야 된다는 생각들을 갖게 됐죠.”

음악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정치가들의 결단이 아니라 미국 록 음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쟁에 최초로 제동을 건 시도는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라고 봐요. 우리는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이연실 등이 그런 맥락을 이었죠. 평화에 대한 갈망들. 그래서 청년문화에 번성이 왔었죠.

그러다가 75년에 대마초 사건으로 주요 연예인들이 활동 정지를 당하면서 맥이 끊긴 거예요. 묘하게 그해 ‘참새를 태운 잠수함’(참새잠수함)이 시작되죠. 본격적으로 창작에 대해 고민하고, 세상을 바꿔놓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됐던 거죠.”

구자형과 그의 형 구자룡이 결성한 참새잠수함은 국내 첫 창작 음악 단체였다. 전인권 강인원 한영애 남궁옥분 곽성삼 한동헌(‘노래를 찾는 사람들’ 대표) 등 수십 명이 거쳐 갔고, 상당수가 대중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참새잠수함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짧은 획을 긋고 3년 만에 침몰한다.

함장 구자룡은 잠시 입산했고, 총무 구자형은 방송작가로 활로를 개척했다. 80년대 후반 라디오 프로그램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구자형의 펜 끝에서 나온 방송이었다.

그는 지난 9월 서울 정동의 카페에 재건한 참새잠수함과 함께 새 함장으로 돌아왔다. 12월 1일부터 내년 3월 10일까지 101일간의 릴레이 콘서트(101콘서트)로 겨울을 건널 심산이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바꾸고 싶은 세상이 있는 것인가. 그는 청록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문화는 넘치다시피 하지만 그 속에 영혼이 결여돼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요즘 가수들이 초대받아 가는 무대를 ‘행사’라고 하잖습니까. 콘서트도 아니고 페스티벌도 아니고. 주최 측이나 가는 사람들이나 정체성이 없는 거죠. 왜 노래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미래지향적이고 예언자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구 함장이 참새잠수함을 몰고 가려는 곳은 어딥니까.

그는 초대 함장인 형을 대부분 ‘함장님’으로 지칭했다. 올해 환갑을 맞은 형 구자룡은 지난 3월 교통사고로 숨졌다.

“함장님이 제안한 세 가지가 있어요. 순수, 다양, 창조. 그런 음악을 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이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비참하게 보는데 사실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거예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대신 완전히 자유로운 음악을 하겠다는 거고, 노래로 그 시대의 진정한 역사를 써 나가겠다는 거거든요. 우리 삶의 진정한 이야기가 노래화(化)되지 않는다는 건 싱어송라이터들의 직무유기랄까.”

이 돈키호테 같은 남자는 기자를 자신이 돌진해야 할 세상과 동일시하는 듯했다. 요즘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법한 말을 면전에서 거침없이 이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거든요. 저는 누군가를 가게 해주는 것이 길이고 스스로 길바닥이 돼서 그걸 행하는 게 진리라고 생각했어요. 진리라는 건 아무래도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참새잠수함은 산소에 민감한 토끼를 잠수함에 태워 승무원들이 산소 고갈에 대비했다는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수병 시절 경험담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게오르규는 시대의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해야 하는 작가의 처지를 토끼에 빗댔었다. 초대 함장 구자룡이 토끼를 참새로 바꿨다.

“노래하는 사람들이니까 새(鳥)로 가야겠다고 한 거죠. 그중에서도 진정한 노래를 하는 참된 새, 토속적이고 서민을 상징하는 새가 되라는 뜻이었죠.”

-가수들이 사회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건가요.

“저는 후배들한테, 심지어는 전인권이나 강인원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야, 우리가 한 20년 동안은 이 무대를 떠나지 말자. 한국 언더그라운드 운동이 뿌리를 내려야 된다. 근데 뭐….”

그는 몸을 돌려 진열대에 전시된 LP음반을 가리켰다. “저게 참새잠수함 첫 앨범이거든요. 저 앨범이 나온 다음에 레코드사에서 다 빼가죠. 어느 날 가 보니까 모임에 저 혼자 와 있더라고요.”

-구 함장 욕심이 과했던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사람들이 참새잠수함에서 영혼을 얻어 나가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죠.”

애초 참새잠수함은 구자형의 콘서트 타이틀로 형이 지어준 것이었다. 구자형은 미아리와 고대 앞을 거쳐 명동의 음악다방 ‘썸싱’에서 DJ를 하고 있었다.

“그땐 싱어송라이터가 없었어요. 제가 만든 곡이 한 20여곡 됐어요. 75년이니까 21살 때 첫 콘서트를 했죠. 형이 ‘공연하려면 타이틀이 있어야지’ 하면서 참새잠수함을 주시더라고요. 우리나라엔 공연 타이틀이란 게 없었을 때예요.”

-그게 어쩌다 모임이 돼버렸습니까.

“공연 끝나고 형한테 개인 공연 타이틀로 쓰기는 아깝다고 했어요. 음악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죠. 참새 정신을 공유해서 한국음악을 좀 바꿔놓고 싶었어요.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저는 왜 우리는 듣기만 하나, 왜 받아만 먹나 싶었죠. 똑같이 음악을 하는 대등한 입장인데.”

대학로의 한 성당을 빌려 시작한 참새잠수함의 공연은 명동으로 넘어가면서 탄력이 붙는다. 세시봉 DJ 출신 이백천이 사회를 봤다.

“그때부터 제가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규합을 했어요. 서울대 한동헌부터 이화여대 안혜경 추혜란, 서강대 황세환, 경희대 최송무 등이 모였죠. 대학은 안 다니지만 최성호라는 싱어송라이터가 나타났고, 곽성삼이라는 정말 걸출한 가수가 합류했어요. 그 다음 전인권 강인원이 노래, 아니 그림을 잘 그렸어요. 포스터 그려서 빵집에 갖다 붙이고. 그땐 새싹들이었죠. 자기들이 유명해질 줄도 몰랐고.”

구자형이 참새잠수함 해체의 도화선이 됐다는 음반을 꺼내왔다. 그의 이름은 안 보였다.

“이 판에는 제 노래가 없어요. 작곡은 있어요. ‘김대향’이 제 예명이에요. 큰 고향이 되고 싶었어요. 그때 애들한테는 내가 리더였는데 우리 함장님이 너는 빠지라는 거예요. 여기서 빠지는 바람에 제가 갑자기 신뢰를 잃어버린 거예요. 야, 저거 별거 아닌가 보다, 이렇게 돼 버렸어요.”

-왜 그랬답니까.

“친인척간의 비리로 비쳐질 수 있다는 거예요. 형제가 그렇게 하면. 여기 ‘기획’은 형이잖아요. 그때 못했더라도 나중에 했어야 되는데 참새잠수함이라는 이름으로 여럿이 함께하는 음반만 하겠다는 고집 때문에 아까운 기회를 여러 번 잃어버렸죠.”

-89년 명륜동에 음악 카페 ‘바르비종’을 차렸었죠.

“김광석 첫 콘서트 장소가 거깁니다. 김수철 임지훈 신현대 이종만 김두수 등이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했어요. 저도 했었고. 라이브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2년 정도 했어요.

-상호를 왜 참새잠수함이라고 안 했습니까.

“저는 그때만 해도 참새잠수함을 너무 존경해서 카페 이름으로 붙일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동길 초입은 장난질치는 여학생들로 왁자지껄했다. 거리에서 날아온 고성이 건물 3층 카페 유리창을 흠씬 두들겼다.

-참새잠수함을 되살린 장소는 왜 이곳인가요.

“내년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함장님 1주기 추모공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기념관장하는 후배가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해서 민속 주점이던 여기로 왔는데 바로 이 자리에 제가 앉았어요. 저게 옛날 문화방송 자리거든요.”

우리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자리에서는 전면 유리창 밖으로 경향신문사 입구가 내려다 보였다. 그는 박물관 유리관 속에 박제된 과거를 들여다보듯 응시했다.

“82년에 저 문으로 제가 드나들면서 ‘0시의 플랫홈’이라는 심야 라디오방송부터 시작을 해요. 3년 후에는 이문세의 별밤을 하면서 좀 날아다니기 시작하죠. 한 3년 했을 때 문세가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형이 나 만들었지’ 그래요. 그걸 왜 아무도 없는 데서 하느냐고(웃음). 그러니까 추억이 많은 거예요. 이 주점을 하던 분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찍은 홍기선 감독이었는데 마침 ‘모레 그만둬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얼른 하겠다고 한 거죠.”

-형의 죽음이 참새잠수함 부활에 영향을 미쳤나요.

“탁 그 소식을 듣는 순간에….”

말은 한참 이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한마디씩 내보내는 입은 위태로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도 돌아올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떠나신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 이렇게 돌아왔구나, 이 형이. 예전에 그렇게 시작했듯이 다시 시작하라고….”

비통함은 기어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그를 무너뜨렸다. 중년 남자의 눈물샘은 다 말라서 먼지뿐인 줄만 알았는데 구자형의 눈가는 이미 축축했다. 그는 울음을 통째로 삼키고 멋쩍은 듯 조소했다. “어우 눈물이 나네. 진짜 그랬어요. 죽음이라는 게 정말 영원히 돌아와서 늘 곁에 있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추구했던 걸 다시 시작해라, 그렇게 전 받아들였어요.”

-구 함장이 여러 방면에 열심을 쏟은 건 형에 대한 열등감 때문입니까.

“들켰네. 근데 함장님 돌아가시면서 그냥 무릎을 꿇어버렸죠. 나는 형한테 안 되는구나. 형의 생각, 그건 거슬러 올라가면 게오르규의 생각인 거죠. 게오르규가 잠수함에서 토끼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 지금 이 공연까지 오는 거예요. 더 올라가면 인간의 존엄성과 세상의 평화와 이상적 세상인 천국을 이 땅에 구현하려고 온 예수의 일생이나 천지창조의 의미까지도 연결돼 있는 거죠.”

-심오하게 생각하는군요.

“형의 삶을 보면서 음악적 순교라는 말이 생각이 났어요. 진리를 위해 걸어갔던 사람들, 시대와 충돌했던 사람들. 그 시작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든든해진 거죠. 저는 참새잠수함을 못 만났으면 어정쩡한 낭만주의자가 됐거나 적당한 싱어송라이터로 사라졌을 거예요. 참새잠수함을 만나서 영혼에 불꽃이 들어왔고 그 불꽃을 추적하다가 예수의 십자가 매달림을 발견한 거죠.”

-구 함장의 시대정신은 20대였던 70년대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거부한 것도 있고, 그때가 행복했는데 거기서 벗어날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랬어요. 제가 좋은 걸 굳이 나이 들었다고 바꿀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저도 트렌드(유행)에 휘말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정말 공허하더라고요.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는 거죠. 소비자로 끝나고 안내자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자기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자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세시봉 열풍을 보면 앞으로 가기에도 벅찬 세상인데 과거 향수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닐까요.

“(윤)형주 형이 공연 가면 자기들 노래 듣고 심지어 10대들이 운대요. 포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사람들이 바빠서 잃어버린 것들을 뒤에서 주섬주섬 챙기는 거죠. 그러고선 노래로 만들어서 다시 돌려주는. 10대, 20대가 궁금해하는 낭만은 설명할 순 없는데 느낄 수는 있잖아요.”

그는 중학생 때 지붕을 뚫고 들어온 빛 속에서 예수 제자인 베드로의 음성을 들었다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고는 말했다.

“최초의 콘서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던 것처럼 콘서트는 1만명이든 5만명이든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더라도 한 곡의 감동을 나눠 먹고 여운을 넉넉히 안고 갈 수 있죠. 콘서트의 정신과 목적은 오병이어에서 찾아야 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내 얘기가 아니라 사랑의 얘기를 해야죠.”

대화를 마쳤을 때 그가 “형이 마지막에 쓰고 있던 모자”라며 손을 뻗었다. 분홍색 야구모자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