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성범죄 유형 신설… 도가니 이제 가차없다

입력 2011-11-29 23:38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뒤에서 남자의 손이 목을 조여 왔다. 성폭력, 성추행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내가 범죄의 손아귀에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아서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던 날 어두운 공사장으로 질질 끌려갔다. 범인이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있는 힘을 다해 전철역 쪽으로 내달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영화 ‘도가니’의 원작소설을 쓴 작가 공지영(48)씨의 생생한 경험담이다.

공씨는 29일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아동·장애인 성범죄 양형 개선방안 공개토론회’에 참석, 자신이 대학교 2학년 때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일을 털어놓으며 ‘도가니’ 집필 등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공씨는 아찔했던 성폭력 위험에서 벗어난 뒤 1년6개월간 큰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날의 경험이 공씨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공씨는 “그날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보호자 없이 혼자 길을 걸을 수 없었고 모든 남성들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법원 판결을 보면서 왜 성범죄자들에게 가벼운 처벌을 내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공씨는 “법관이 너무 오래도록 남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이 남성과 여성들의 DNA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정부의 성폭력 대책이 사후약방문식인 경우가 많다”며 “화학적 거세 등 강화된 처벌을 받는 가해자는 전체의 1%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토론회에는 청각 장애인을 위해 수화 통역자가 2명 배치됐다.

토론회를 주최한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21일 전체회의를 열어 장애인 대상 성범죄를 새로운 성범죄 유형으로 분류하고 대폭 강화된 양형기준을 적용하는 내용의 성범죄 양형기준 수정방안을 의결했다.

수정방안에 따르면 종전에는 일반적 성범죄를 13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강간죄와 강제추행죄,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 등 세 가지로 구분해 양형기준을 설정했으나 장애인 대상 성범죄가 추가됐다. 장애인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그동안 지적장애인의 경우 신체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정신연령이 낮아 성폭력 피해상황에 대한 항거능력이 떨어지는데도 가해자에게는 일반적인 성범죄 처벌기준이 적용돼 왔다. 하지만 장애인 대상 성범죄 유형이 신설됨에 따라 13세 이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도 높은 형량이 선고될 수 있게 됐다. 양형위는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의 권고형량도 상향 조정하고 집행유예 기준을 강화키로 했다.

양형위는 이와 함께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범죄인 지식재산권, 금융·경제범죄군에 관해 보다 엄정한 양향기준을 마련키로 했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