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어려운 이웃 섬겼던 ‘성자 목사’ 기린다… 활석 정규태 목사 기념관 12일 1일 개관

입력 2011-11-29 13:28


‘성자(聖者) 목사’로 불리는 활석(活石) 정규태(1909∼97·작은 사진) 목사 기념관이 문을 연다. 정규태목사추모사업회는 1일 오전 충남 서천군 화양면 기복리 250번지 정 목사가 설립한 오순교회(김형덕 목사)에서 ‘활석 정규태 목사 기념관’ 개관식을 갖는다. 정 목사의 호를 따 ‘활석관’으로 명명된 이 기념관은 그의 생전 성령(신앙부흥)운동을 기리기 위해 3억여원을 투입, 기공 1년 만에 완공됐다. 교회 새 성전 2층에 66㎡ 규모로 정 목사의 유품과 사진, 기록문서 등 40여점이 전시된다.

개관식에는 정 목사가 소속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관계자와 지역 인사가 참석해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성령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진보와 보수 간 대화를 지속하며 화해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정 목사의 에큐메니컬(교회 연합과 일치) 정신을 기릴 예정이다.

그가 ‘성자목사’로 불린 이유는 세상 바람에 맞서 오직 ‘성직 외길’만 걸어왔기 때문이다. ‘다양성 안의 일치’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기장 속 야당’이란 별명을 얻었다. 일부에서 ‘반기장적 신비주의’, 또는 교단을 분열시키려는 수준으로 폄훼하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응 없이 건강한 교회 구현에만 힘을 쏟았다. 제1회 기장 전국교역자 기도회를 효시로 성령운동을 위한 부단한 행보를 계속했다.

정 목사는 충남 서천 나주 정(丁)씨 집안 출신.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직계다. 31년 청주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다 32세 되던 해에 당시 인기직인 교직을 그만두고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까지 치렀다. 부여와 서천에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목회기간 내내 거지를 돕고 대접하는 일에 힘썼다.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를 못 내는 아이들을 도와주느라 주머니는 비어 있기 일쑤였다. 국내 최초의 종중교회인 오순교회를 74년 설립했다. 충남 보령에 성주산기도원을 설립, 기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선교와 구제 열정은 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3남5녀의 자녀 중 2남 정학진 목사는 군목과 김제 목회를 거쳐 82년 부천 동산교회를 개척했다. 정학진 목사의 장남 정해동 목사는 전북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후 뒤늦게 소명을 받아 한신대에 들어갔다. 기장 총회 선교국장 등을 지내고 현재 필리핀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3남 홍진(전 은광여고 교목), 3녀 신자씨의 남편 백형기 목사(전 기장 총회장·한신대 이사장, 광명의집 관장), 4녀 영자(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평화통일위원장)씨 등을 비롯 집안 전체가 교회와 사회 사업에 앞장서 교계에선 꽤 알려진 집안이다. 2남 용진씨의 처 최부현 목사는 예장 통합 교회 3곳을 개척했다.

유자녀 7남매는 선친의 ‘성직 외길’ 인생을 후세에 전하고자 ‘성자목사님 거지선생님’ 추모집과 추모영상 CD을 제작했다. 이날 오순교회 원로 장로에 추대되는 정운진 장로는 “정 목사는 활석(산돌)이라는 호(號)처럼 가정교육 및 교회 화목,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천상 목회자’”라고 말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