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이영미] 아프니까, 정치

입력 2011-11-29 18:07


출판가 보릿고개라는 11월 비수기. 위축된 신간시장이 올해는 유독 쪼그라들었다. 스티브 잡스 전기 탓이다. 출판사들은 ‘잡스만은 피하자’며 오래 준비한 야심작을 12월로 미뤘다. 선택은 현명했던 걸로 보인다. ‘스티브 잡스’는 나머지 책들을 ‘올킬’하며 한 달 만에 40만부가 팔렸다. 출판사가 “현기증 난다”고 고백한 광속이었다.

그렇다고 ‘잡스 쓰나미’를 버텨낸 책이 없는 건 아니다. ‘나꼼수 군단’의 책들이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 출연진들은 잡스 바람 속에서도 선전했다. 좌장격인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는 온·오프라인 서점 종합 베스트 1∼3위를 오르내리며 30만부가 나갔다. 뒤를 잇는 건 시사평론가 김용민이다. 5개월간 무려 3종의 책(‘나는 꼼수다 뒷담화’ ‘조국 현상을 말한다’ ‘보수를 팝니다’)을 내 12만부를 팔았다. ‘달려라 정봉주’는 출시 3일 만에 2만부, 2008년 나온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는 새삼스럽게 3만부가 팔려나갔다. 여기에 나꼼수에 출연했던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까지 합치면, 나꼼수라는 단일 브랜드가 두 달간 팔아치운 책은 무려 50만부에 육박한다.

남자 4명의 뒷방 수다가 50만부의 ‘판매파워’를 키웠다는 건 기억할 만한 현상이다. 책이라는 지극히 보수적 매체에서 가장 일상어에 가까운 구어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 주목할 건 ‘50만’이란 숫자가 발신하는 신호다.

50만 명이라면 애서가 50만 명일 수는 없다. 1년에 고작 한두 권, 많아야 서너 권을 사는 독자. 독서의 중산층이 움직였다는 얘기다. 베스트셀러가 말하는 건 독서대중의 움직임이라는 얘기다. 지난해부터 그들이 만들어낸 베스트셀러의 계보는 이렇게 이어진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누적 판매부수 130만부)∼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50만부)∼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150만부)∼문재인의 ‘운명’(30만부)∼‘닥치고 정치’.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자유시장경제의 함정에 눈을 뜬 이들은 20대 ‘알바’ 세대의 좌절이 모두의 불행일 수 있다는 데 깊이 공감했다. 아픔을 공유한 뒤 행보는 단호해졌다. 뚜벅뚜벅, 독자들은 정치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단행동의 첫 신호는 ‘운명’이었을 테고, 이제는 ‘닥치고 정치’를 외칠 용기를 내게 됐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한 무리의 성인들이 해나간 2년 과정의 ‘자기주도 정치학습’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 2년 독자가 그린 학습의 궤적은 뚜렷하다.

독자 다수가 정치를 말하는 건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2000∼2006년 100만권 이상 팔린 책 95종 중 정치·사회 서적으로 분류될 책은 한 권도 없었다(‘21세기 한국인은 무슨 책을 읽었나’). 3분의 2를 차지하는 60여종은 ‘봉순이 언니’ ‘반지의 제왕’ 등 국내외 문학. 그 뒤가 경제경영(40종), 수필류(37종) 등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로마인 이야기’ 같은 인문 책도 있지만, 이들 책이 바라보는 건 과거일 뿐 현재의 정치 사회적 현실은 아니었다.

예스24의 일일 베스트셀러를 보면, ‘닥치고 정치’ ‘달려라 정봉주’가 ‘스티브 잡스’를 누르고 27∼29일(전일 기준) 3일 연속 1, 2위를 차지했다. 사회성 강한 책이 유독 잘 팔리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지난주 집계에서 잡스가 2위로 내려앉았다. 1위는 ‘닥치고 정치’였다. 뒤집어진 순위가 물대포가 동원되고 경찰서장이 두들겨 맞았던 지난주 시내 중심가 시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있다. 당분간 많은 이들이 가장 재밌게 읽을 책. 그건 정치서적이 될 모양이다.

이영미 문화생활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