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로존 재정 위기] 유럽판 ‘국채보상운동’… 伊·스페인, 애국심에 호소 국채 팔기 안간힘

입력 2011-11-29 23:38

구한말 조선에서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이 21세기 유럽 땅에서 재현되고 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나라들이 금융기관들의 부실전염 우려로 국채 매입을 꺼리는 바람에 국가부도 위험이 커지자 애국심에 호소해 채권 팔기에 나선 것이다.

◇이탈리아 국채 수수료 면제=이탈리아에서 28일(현지시간)은 이른바 ‘국채 사는 날’이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했다. 은행들은 이날 하루 국채 매매 수수료를 받지 않았다. 국민의 국채 매입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였다. 51세 시민이 아이디어를 냈다.

국채는 평소보다 많이 팔렸다. 2만 유로(약 3000만원)어치를 산 시민 카를라 파월(여)은 “우리나라 빚은 ‘살인자’다. 이탈리아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가 올까 두렵고, 유로가 사라질까 무섭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축구선수협회는 국채 매입 홍보 활동을 벌였다. 은행들은 행사가 상징적 차원에서도 성공을 거뒀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정작 재정난의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는 “나는 종일 밀라노에 있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뇌물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국채 수익률은 최근 7∼8%로 급등해 위험지대에 진입했다. 나라 밖과 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비용이 늘어나니 정부가 국민에게 국채를 사 달라고 애원한 셈이다. 이날 거래된 2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7.2%였다. 국채 수수료 면제 행사는 다음 달 12일 한 차례 더 열린다.

스페인에서도 대대적인 국채 매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돈이 부족한 지방의 자치주에서 오히려 더 큰 애국심이 발현된다. 카탈루냐에선 42억 유로가 모였다. 시민 투자자 20만명이 낸 것이다. 벨기에는 최근 3일 동안 12억 유로어치 국채를 시민들에게 팔았다. 이브 레테름 총리가 스스로 국채에 투자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직접 국채 팔기에 나선 결과다.

◇“유럽중앙은행 국채 더 사라”=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재정난에 빠진 각 나라 국채 매입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ECB는 지난주 유로존에서 국채 86억 유로어치를 매입했다. 최근 3주간 최대 매입 규모였지만 각 나라 정부 관계자들은 시장을 안정시키기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피에르 카를로 파도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8일 “ECB가 국채를 더 사 국채 수익률의 한계를 정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CB는 그러나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통합 등 획기적 조치가 있어야 대량 국채 매입을 결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