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목사’ 활석 정규태 목사 기념관 1일 개관

입력 2011-11-29 13:10


[미션라이프] ‘성자(聖者) 목사’로 불리는 활석(活石) 정규태(1909∼1997) 목사 기념관이 문을 연다.

정규태목사추모사업회는 1일 오전 충남 서천군 화양면 기복리 250번지 정 목사가 설립한 오순교회(김형덕 목사)에서 ‘활석 정규태 목사 기념관’ 개관식을 갖는다.

정 목사의 호를 따 ‘활석관’으로 명명된 이 기념관은 그의 생전 성령(신앙부흥)운동을 기리기 위해 3억여원을 투입, 기공 1년만에 완공됐다. 오순교회 새 성전 2층에 66㎡ 규모로 정 목사의 유품과 사진, 기록문서 등 40여점이 전시된다.

개관식에는 정 목사가 소속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관계자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해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성령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진보와 보수간 대화를 지속하며 화해의 끈을 놓지 않은 정 목사의 에큐메니컬(교회 연합과 일치) 정신을 기릴 예정이다.

그가 교계에서 ‘성자목사’로 불린 이유는 세상 바람에 맞서 오직 ‘성직 외길’만 걸어왔기 때문이다. ‘다양성 안의 일치’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기장 속 야당’이란 별명을 얻었다. 일부에서 ‘반 기장적 신비주의’, 또는 교단을 분열시키려는 수준으로 폄훼하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응 없이 건강한 교회 구현에만 힘을 쏟았다. 제1회 기장 전국교역자 기도회를 효시로 성령운동을 위한 부단한 행보를 계속했다. 기장과 예장 분열 당시 화해 무드 조성에 혼신을 다했다.

조부는 충남 서천 나주 정(丁)씨 양반 가문 출신.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직계다. 1931년 청주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다 32세 되던 해에 당시 인기직이었던 교직을 그만두고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렀다. 부여와 서천에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목회 기간 내내 거지를 돕고 대접하는 일에 힘썼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를 못내는 아이들을 도와주느라 월급봉투는 비어있기 일쑤였다. 국내 최초의 종중교회인 오순교회를 74년 설립했다. 충남 보령에 성주산기도원을 설립, 기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면 한신대 동문회가 된다. 3대가 모두 한신대 동창에다 기장에서 목회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교와 구제 열정은 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슬하에 3남 5녀의 자녀 중 2남 정학진 목사는 군목과 김제 목회를 거쳐 82년 부천 동산교회를 개척했다. 무엇보다 청빈을 강조하며 교회에서 궂은 일을 가장 많이, 또 앞장서기로 이름나 있다.

정학진 목사의 장남 정해동 목사는 전북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후 뒤늦게 소명을 받아 한신대에 들어갔다. 기장 청년 전국연합회 총무, 총회 선교국장 등을 지내고 현재 필리핀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3남 홍진(전 은광여고 교목), 3녀 신자씨의 남편 백형기 목사(전 기장 총회장·한신대 이사장, 현 화성 광명의집 관장), 4녀 영자(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평화통일위원장)씨 등을 비롯 집안전체가 교회 일에 앞장서는 교계에선 꽤 알려진 집안이다. 이밖에 2남 용진씨의 처 최부현 목사는 예장 통합 교회 3곳을 개척했다.

유자녀 7남매는 선친의 ‘성직 외길’ 인생을 후세에 전하고자 ‘성자목사님 거지선생님’ 추모집과 추모영상 CD을 제작했다. 3남 홍진 목사는 이 책에서 “충남노회장 7번과 기장 총회장을 지낸 아버지는 대외 경력보다도 부여 청포교회에 3번이나 초빙됐고 부여·서천 일대에서 교단을 초월해 ‘성자 목사님’으로 불린 것을 더 큰 영예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이날 오순교회 원로 장로에 추대되는 정운진 장로는 “정 목사는 활석(산돌)이라는 호(號)처럼 가정교육 및 교회 화목,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천상 목회자’”라고 말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