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9) 한국교회의 해외선교(3)
입력 2011-11-27 17:58
1913년 드디어 中 선교 관문 山東을 열다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는 1912년 장로교의 총회 조직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독노회 조직(1907)을 기념하여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한 이래(1908) 일본 도쿄에 한석진 목사(1909)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최관흘 목사(1909)를 파송했던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으로 해외선교를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즉 총회 전도국은 “노회를 시작할 때에 제주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 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총회에 청원하게 되었다. 이 청원은 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과는 달리 이민족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으로서 “이때까지 우리는 선교사를 받아만 왔다. 이제 우리는 장로교총회를 조직하면서 우리도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13년 5월 박태로(朴泰魯)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등 세 목사를 중국 산둥성(山東省)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의 시작이자 진정한 의미의 타 문화권 선교의 시작이었다. 산둥성은 중국문화의 발상지로서 남북한을 합한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 광대한 지역이었다. 당시 인구는 약 5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곳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도국장 길선주 목사의 열정, 중국현지를 방문하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총회 전도부 한위렴(William B Hunt)의 실사, 파송에 앞서 선교지를 방문했던 안주교회 김찬성 목사와 박태로 선교사 후보의 현지교회 지도자들과의 사전 협의, 그리고 중국교회 화북대회의 허락과 배려로 가능했다. 산둥성은 공자가 출생한 지역으로 외래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다. 중국교회는 한국선교사들의 활동을 산둥성 중심부인 라이양(萊陽) 지역으로 제한했는데, 바로 이곳에 세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다.
산둥성 선교를 시작하다
세 사람은 1913년 11월 산둥성 라이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중국 가옥 한 채를 임대하여 거주하면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년 만에 세 사람의 수세자와 40여명의 신자들을 확보했으나 박태로(1870∼1918) 선교사는 풍토병으로 1916년 4월 말 귀국했고, 1918년 9월 6일 황해도 봉산 사리면의 자택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른 두 사람도 본국교회의 허락도 없이 1916년 선교지를 이탈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이들의 사역은 불과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장로교 총회는 불법이탈을 중시하여 방효원 목사를 파견, 사실을 조사토록 했다. 그는 선교지 이동이 이유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앞의 두 선교사를 사임케 하였다. 그리고 총회는 이미 중국을 다녀온 방효원(方孝元·1886∼1953) 목사에게 중국 선교사로 갈 것을 권유하여 1917년 가을 공식적으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선전의 신선중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평양신학교를 거쳐 평북노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였다. 그 이후 대구제일교회를 시무하던 홍승한(洪承漢) 목사도 교회를 사면하고 그 뒤를 따랐다. 이미 28명의 수세자와 6곳의 기도소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1918년 11월 19일에는 박상순 목사와 김윤식(金允湜·1891∼?) 의사가 이곳에 증파되었다. 이들은 11월 4일 평양을 떠나 옌타이(煙臺·10일)를 거쳐 19일 라이양에 도착하였다. 김윤식은 한국인 최초의 타 문화권 의료선교사였다. 평남 숙천 출신인 김윤식은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 수학한(1913∼1917) 의사였다. 그가 대구 계성학교에서 일하고 있을 때 친근한 관계였던 대구제일교회 홍승한 목사의 권고로 중국선교를 자원하여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알렌이 내한한 지 34년 만에 한국인 의료선교사를 중국 라이양에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의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그를 목사 선교사와 동일하게 대우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산둥성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선교사회’가 조직되었을 때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등은 정회원이었으나 김윤식은 언권회원으로 참석한 사실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의료를 통한 중국선교
김윤식은 1918년 12월 4일 라이양에 계림(鷄林)의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환자가 매일 3, 4명에 불과했으나 차츰 증가하여 1921년 한 해 동안 6000명의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중국은 한국교회의 주된 선교지였다.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한국선교사들은 중국어 습득이 빨랐고 중국 문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났다. 따라서 중국은 가능성 있는 선교지로 인식되었다. 1919년에는 이곳에 ‘조선선교사회’가 조직되고, 선교사자녀학교도 설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2년에는 이대영 목사가 파송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제14회로 졸업한 그는 그해 9월 평양에서 모인 조선야소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 선교사 임명을 받고 이듬해 6월 중국으로 파송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있어서 특기할 일은 1931년 김순호 여선교사를 파송한 일이었다. 이해 9월 11일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제20회 장로교 총회에서 감격스런 파송예배가 거행되었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축족(縮足)을 강요받고 살아가는 중국여성들을 위해 김순호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하게 되었는데, 그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타 문화권 여선교사였다.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서울 정신여학교, 일본 요코하마신학교 출신인 그는 7년간 산둥성에서 일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1938) 칭다오(靑島)로 옮겨가 사역하였다. 1941년에는 만주로 가서 1942년까지 일하고 귀국했다. 광복 후에는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일했으나 6·25전쟁 중 순교자의 길을 갔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